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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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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차쿠의 아침-김대건(1) 날짜 2015.04.22 15:19
글쓴이 관리자 조회 206

김대건(순위도 오후 2시 20분)

"순위도(巡威島)라고?“

“뭔 섬 이름이 이래, 위엄 있게 순시한다는 듯?”

“딴 거야 이브지, 백령도는 하얀 깃털이고, 연평도는 연달아 평평한 들에다, 우도와 대소청도야 뭐…."

“ 위도가 중심이제, 육지와도 거의 붙었고, 서해도를 감독하라고 순위돈가 보군.”

“그러게요, 요즘 같으면 여간 복잡한 게 아니잖아요?”

“봐 봐! 저쪽도 중국 배가 바글바글하잖아!”

“산동 놈들! 관아에서도 조기 잡는 건 어쩔 수 없구먼.”

"바다야 경계가 애매하니까. 지들이 크다 이거지.”

“그래도 육지에 닿는 것은 불법이라고!”

“저 산 위에 망루들… 포졸 눈들이 몇 개야?”

“저것들 관아에서 내쫓기도 하는 모양이지?”

일행을 태운 배는 지난 5월 14일 마포를 출발하여 엊그제 5월 25일 연평도 앞을 지났고 현재는 순위도를 끼고 백령도로 향하고 있다. 순위도를 지나며 사공들이 이렇게 저렇게 떠드는 동안 대건은 바다만 보고 있었다. 손에는 붓이 들렸고 무릎 위에는 지금까지 그려온 황해도 연안의 얼개지도가 있다. 지도를 그리던 손이 멈춘 지 오래다.

이상했다. 오랜만에 바다를 보니 일말의 감상에 젖는 것이니까.

작년 5월과 9월 두 차례 죽다 살아난 바다이기도 했다. 사공들과 섞여 말하기가 싫어지는 이유도 자꾸 보고 싶은 사람들이 해면에 어른대는 것이다. ‘나답지 않게 이 무슨 감상적’하며 대건은 머리를 흔들어 집중해 보려 하지만 얼굴들은 도도한 밀물처럼 넘실거려 왔다.

‘어머니….’

지난겨울 내내 페레올 주교의 배려로 어머니와 함께 지낼 수 있었다. 부활절 이후부터야 본격적인 사목활동이 시작될 것이니 그때까지 은이 공소를 거점으로 근거리 사목을 하라는 고마운 지시였다. 주교 자신은 한양에서 조선말 공부에 전념할 것이라 했다. 그 덕에 지난겨울은 참 푸근했다.

열여섯 살 때부터 시작된 10여 년간의 이국 떠돌이 생활, 광활한 만주 벌판을 사흘이 멀다 드나들 때에도 마음의 중심은 고향이 아닌 바로 은이 공소였다. 나침 바늘이 한 방향이듯 마음은 늘 어머니를 가리키고 있었다. 겨우내 어머니께 못해드렸던 것들도 해드렸고 못 받았던 사랑도 받을 수 있었다. 때로는 잠자코 사랑받는 것이 한 사제아들로서 어머니에게 해드릴 수 있는 으뜸 효도였다. 아무 반찬 없는 된장국 하나를 맛나게 먹는 자식을 바라보던 어머니, 그 겨울은 밤마다 얼마나 짧았는지 모른다.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가 최후까지 어떻게 꼿꼿한 언행으로 하느님을 증언했는가, 그 얘기도 끝나지 않았는데 첫 밤이 하얗게 샌 것이다. 할머니 이야기, 숙부들과 당고모의 치명, 사촌들 이야기, 그리고 어머니 고 우르술라의 심사들…, 듣고 있는 데만 열흘이 훌쩍 가버렸다. 대건은 말할 기회도 없었다. 굳이 고생한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도 않았지만 말하지 않아도 얼추 아는 눈치셨다. 하기는 어머니가 누구신가. 뒤에서 아들 세수하는 태만 봐도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은 어떤 심경인지 훤히 꿰뚫는 눈이 아니신가? 노모보다 더 희어진 머리색에 어떻게 말꼬를 틀까 하는 자식 앞에서 하신 말씀도 “집안 내력이겠구먼.” 딱 이 한마디뿐이셨다.

그 밤에, 어머니는 당신도 모르게 아들의 손을 곽 잡으셨다. 더는 고운 손도 아니셨다. 아버지가 포졸들에게 끌려가실 때 생긴 상처부터 움푹 잡혔다. 어머니도 당신만의 자식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터라 부를 때도 편히 ‘대건아!’ 한마디를 못하신다. 그것은 10여 년 전 아들을 하늘께 바칠 때부터 각오한 일이기도 했다.

그 밤에, 대건도 어머니의 손을 가만히 잡고 있었다. 마음도 가만히, 생각도 가만히, 잡은 손도 가만히, 어머니 눈에서 주르르 물기가 떨어져도 가만히만 있었다. 그동안 무엇엔가 사로잡힌 사람처럼 바깥으로 돌기만 했으니 원래 세상에 내어주신 분 앞에서 가만히만 있고 싶었다. 그러면서 대건은 마음속으로 한참을 말씀드렸다.

‘어머님 저보다 저를 더 알고 계시기에, 저보다 저를 많이 기억하고 계시기에, 한 사람으로서 당신을 알고 싶습니다. 팔월 뜨거운 복덩이로 태어나 벌거숭이로 당신 앞을 기어 다녔고, 걸음마를 해냈고, 말을 배웠을 겝니다. 그러곤 얼마 안 가 말대꾸를 해댔고, 목숨을 주신 어미 앞에서 다른 생각을 고집 세우진 않았습니까? 단단히 벼르고 먼저 얘기를 꺼내던 날, 더 큰 부모를 찾아가겠다고 털어놓던 그날, 눈자위를 교차하던 두 갈래 빛 하늘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저는 모르겠지요. 앞으로도 영 모르고 말겠지요. 언젠가 툇마루에 혼잣말로 하셨다는 말씀, 자식들 낳아 키워보아라, 부모 되어 부모 마음 알게 될 거다. 그 마음을 저는 영 모르고 살겠지요. 어머님, 이따금씩 제 안에는 당신이 들어앉아 계심에 놀랍니다. 아버지만 계신 줄 알았더니 얼마 전부터는 어머니의 계심도 봅니다. 한 사람으로서 좋든 싫든 간에 그 모습은 바로 저였고, 또한 당신이셨습니다. 결국 부인할 수 없는 사실 하나, 당신만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유독 자식만이 안고 있는 아슴한 경계임을….

그렇습니다. 당신은 나의 한계입니다. 날개를 달아주셨지만 당신의 덫을 함께 채우셨습니다. 새삼 어머니까지 알고자 함도 이런 까닭에서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을 아직도 자식을 만들고 계심입니다. 어머님, 밤이 무척 깊습니다. 부질없는 생각들도 따라 깊어져 공연한 근심되실까 저어됩니다. 이 겨울 부디 나무 아끼지 마시고, 따뜻이 지내소서. 그리고 오래 옥체 보존하소서.’

불효자의 고백이었던 같다.

그때 노모는 갑자기 젊은 아들보다 더 강하게 손을 쥐셨다. 울지 않으셨다, 아니 울지 않겠다는 다짐이셨다. 그러니 아들 신부님 어미 걱정일랑은 말라는 뜻이었다. 뜻한 바 마음껏 이루시라는 무언의 격려이셨다.

‘양업아!’

함께 떠오른 얼굴이 양업이었다. 지극히 사랑한다는 말로도,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든든함이 언어로서는 부족한 나의 벗 양업!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건아 잘 지내니, 난 말이야 네 이상이 높아 부럽기도 하지만 걱정도 되곤 해. 목표를 너무 높게 잡아놓고 그걸 해내려고 힘들어 할 네가…. 앞으론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말하지 그러니?’

아니, 아니다 업아. 그래도 피하고 싶진 않아. 너도 알다시피 난 대개 첫 번째 떠오른 것이 최선이더라. 최선대로 하는 게 힘은 들어, 근데 힘들더라도 그대로 가야지 제일 기쁜 것을 어찌하냐? 역시 양업이 너는… 세상위에 나를 간파한 너라는 사람이 있어 부끄러워지는구나. 그런데 그거 아니? 모든 부끄러움까지 알아준다는 게 마음 든든해지기도 한다는 것을.

달고 다녔던 요통은 대단히 좋아졌다. 어머니가 해주는 더운밥을 뜰 때마다 네 생각이지만 나의 허리나 네 고질적 동상이 결국은 영양 부족이 아니겠나 하는 거다.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대건에게 다시 세차게 이는 예감이란 이번 항해는 이상하리만치 지난 세월 속의 만남들이 그리움의 파도처럼 밀려온다는 것이다. 마음이 왜 이런지 모르겠다, 왜 이렇게 감상적이 되는 것일까. 바닥도 없이 가라앉는 깊이를 가늠조차 할 수 없다. 너무 순탄하기만 한 항해라서 그런가.

최근 만사가 순조롭게만 풀렸었다. 부활 때에 페레올 주교께 “듣기에 4월부터 6월 조기잡이 철엔 백령도 일대가 중국어선 천지랍니다.”하고 보고했더니 주교의 지시가 “그러면 김 신부가 해로 탐색 좀 하고 오시게.”였다. 내일이라도 당장 입국했으면 하는 선교사들로는 소팔가자의 메스트르 신부와 양업 부제가 일차 대상이고, 역시 중국에서 대기하고 있는 리델 신부, 장수 신부, 페롱 신부, 푸르티에 신부, 베르뇌 신부, 프니티코라 신부 등… 해로만 찾는다면 당장이라도 들어올 성직자가 줄줄이 섰던 것이다.

페레올 주교의 판단으로 조선 팔도에서 제대로 사목을 하려면 일단 두세 명의 성직자는 더 들어와야 했다. 최양업 부제는 입국과 동시에 바로 사제품을 주어 대건 신부와 함께 공소순회를 맡길 참이 양인들은 아무리 상복을 걸친다 해도 몇 곱절이나 위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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