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회원가입  |  로그인  |  사이트맵
회원가입  |  아이디/비밀번호찾기
일반자료실
일반자료실
제목 차쿠의 아침-배주인 임성룡(3) 날짜 2015.05.19 10:45
글쓴이 관리자 조회 233

해주 감영에 온 지 사나흘 되었을까.

“죄인 김대건은 들어라, 이것들이 다 무슨 물건이냐?”

백령도로 출동했던 비상조가 돌아온 것이다. 그 중국 배들은 느닷없이 들이닥친 조선 포졸들에게 아연실색했고 탁덕이 무성성당에 전해달라던 편지와 동봉한 지도를 죄다 내주었다. 지금 감사의 손에는 베르뇌, 메스트르, 리부아 탁덕에게 쓴 편지들이 고스란히 들려있었다. 동봉했던 지도 두 장도 증거물이 되어있었다. 다 나 때문이다.

“이 편지는 무슨 편지이냐?”

“마카오에 있는 제 친구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마카오가 어디냐?”

“중국의 최남방입니다.”

“네가 마카오를 어찌 아느냐?”

“유학한 적이 있습니다.”

이미 압수된 친필 라틴어 편지가 빼도 박도 못할 물증이 되었으니 탁덕도 마카오 건은 시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건 어느 나라 글이냐?”

“라틴어라는 글입니다.”

“무슨 내용이냐?”

“친구들의 안부를 묻고 저와 가족들의 안부를 전하는 내용입니다.”

감사가 다시 기셀ㄹ 올렸다. 결정적인 증거를 손에 넣었다는 자신감에선지 고압적이 되었다.

“이 작자가, 바른대로 말하라!”

“바른대로 말하고 있소!”

탁덕이 고개를 들어 감사의 얼굴을 바로 보았다. 순간, 감사는 다시 한 번 움찔했다. 탁덕에게 기백 같은 것이 뿜어나는데 단순한 용기에서가 아니라 생사의 초월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광채가 가득한 저런 얼굴빛은 나도 딱 한 번, 사랑하는 아내를 처음 봤을 때이다.

저리 눈이 부시다니 그러면 이자가 무슨 연정에라도 빠져있다는 말인가, 원래 감사는 지도 두 장 대목에서 호통을 치려고 했을 것이다. 아랫배에서는 ‘네, 이놈!’하고 터지다가 그만 목젖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눈치다. 대신 또 존대 비슷하게 나왔다.

“그러면…이 지도는 무엇이란 말인가?”

“무료해서 그저 산천을 그린 것뿐이오.”

“더는 없는가?” “바람에 날려갔으니 없는 것이나 다름없소.”

“본디 지도를 잘 그리는가?”

“감사님, 지도 그리는 것이 제 오랜 취미입니다.”

당초 감사의 문초 계획은 ‘지도를 팔아먹으려고 한 것 아니냐. 서양과 내통하기 위함이 아니더냐?’ 이런 계획을 세웠음이 당연하다. 그러나 탁덕의 눈빛에 빨려드는 순간 흐지부지된 것 같았다. 어차피 중앙에서 다시 파헤칠 일이고 압수한 증거물과 또 실토한 것만으로도 극형감이라는 분위기였다. 누구보다 탁덕이 잘아는 기색이었다. “감사님, 제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다른 두 사람이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그로써 넉넉할 것인데 저에게 물어 무엇합니까? 그로써 넉넉할 것인데 저에게 물어 무엇합니까?”며 담담히 진술했던 것이다.

“죄인은 내일 한양 의금부로 압송될 것이다. 마지막 할 말이 있으면 해보시게!”

문초의 매듭이나 지으려는 기색이었다.

“아직도 천주교를 믿을 것인가?”

“사람이 한 번 나서 한 번 죽는 것은 피치 못할 바이니 오늘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은 오히려 제가 원하는 바입니다. 그러니 오늘 묻고 내일 물어도 오직 이와 같을 뿐이옵니다”

화해도 해주 감영의 문초는 탁덕의 최종진술로 마무리되었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공초록에 기록되었다.

탁덕이 옥에 다시 던져지고 난 후엔 사뭇 삼엄해져 외부와 철저히 격리되었다. 순위도 때는 주민들도 보였으나 여기선 얼씬도 못하였다. 갑자기 근무자를 두 배 이상으로 늘렸는지 외부 간수들도 여럿 보였다. 탁덕이 들릴 듯 말 듯 혼자 중얼거렸다. ‘여기의 마지막 밤이로다. 포졸들도 유종의 미를 거두려고 애쓰는구나. 나도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겠다!’하면서 눈매가 북쪽 하늘을 향했다. 아직 만주에 있다는 양업 부제를 생각하는 듯했다. ‘벗아 지켜봐 줘, 유종의 미를 거둔다. 첫 단추는 내가 궤니 뒤를 부탁한다! 네가 휠씬 많은 일을 해야 할 것 같다.’ 이런 대화라도 나누는지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죄인은 오라를 받으랏!”

6월 15일 아침, 옥중 식사라야 기껏 주먹밥 하나였지만 그것을 마칠 때를 기다렸다는 듯 양치 겸 물 한 모금을 넘기자마자 한 무리의 포졸이 들이닥쳤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고 복장이 다른 것으로 보아 한양 의금부에서 직파된 압송병력이다.

그때였다, 동헌 문 쪽에서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들을 찾으러 왔습니다. 감사님 좀 만나게 해주시오!”

‘오…저 많이 듣던 목소리, 꼭 아버지 음성 같다.’ 아침부터 해주 감영에 들이친 포졸들의 어수선함 속에서도 귀가 번쩍 뜨였다. 꼭 아버지 임치백만 같아 온몸이 소스라치고 있는데 그때 퍽, 복부 깊숙이 찔러오는 발길질에 뒤로 넘어졌고 머리엔 다시 검은 자루가 쓰였다. 이 새끼가 빨리 안 일어나! “네네.” 아물지 않은 발바닥으로 일어서자 역도에게나 사용되는 붉은 포승이 칭칭 감겼다.

“길을 비켜라, 대역죄인 압송 중이다!”

대로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늘어섰는지 짐작이 갔다. 그들로서도 1839년 이후 처음 보는 천주교 국사범 압송이거니와 아마 탁덕이 외국인으로 소문난 모양이다. 구경꾼들은 최근 중국까지 전전긍긍하게 만드는 외국인을 보려고 길가, 나무 위 할 것 없이 장사진을 치고 있음이 감 잡힌다. 덮어씌운 자루 밑으로는 이따금씩 앞장서 가는 탁덕의 발꿈치만 보이는데 그 타박거리는 소리에 불현듯, 몇 년 전 어머니와 천주교 집회에 갔다가 들었던 성경구절이 떠올랐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곳에서… 죽을 수 있나….’

탁덕의 발걸음은 계속 그런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가자, 한양으로. 한양까지 가면 더 이상 갚 데도 없을 것, 한 군데가 더 있다면…업아 보아주렴. 유종의 미를 거둘 것이다.’

내 피 흐르는 발바닥은 정 안 되겠나 싶으면 수레에 태울 것이라 했다. 귓전에는 아직도 ‘아들을 찾으러 왔습니다.’ 해주 감영에서 들린 아버지의 이명이 잉잉대고 있다.

목록 쓰기
개인정보보호정책  |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  이용약관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 10번지 충무빌딩 313호    Tel:02-2269-2930    Fax:02-2269-2932    Email:wonjuse@hanmail.net
COPYRIGHT DOMAHO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