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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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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차쿠의 아침-배주인 임성룡(5) 날짜 2015.05.19 10:48
글쓴이 관리자 조회 263

금부도사의 문초가 의정부나 임금에게 호의적으로 보고됐을까, 그 후 비인격적인 언사나 고문 같은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런것이 아니라면 내부적으로 확정된 사형수에 대한 배려인지도 몰랐다. 덕분에 나와 엄수의 공초까지 수월하게 넘어갔다. 문초자들은 수시로 바뀌었지만 갱초도 드물었다. 거기엔 탁덕의 성격도 한몫했을 것이니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하는 사람 앞에선 직초하라는 고함도 필요 없었던 것이다.

공초의 시간이 남아서였을까, 어떤 문초자들은 서양의 문물을 묻는 것에 더 열을 올렸다. 탁덕은 가능한 소상히 알려주었다.

대국이 영국 군함 몇 척에 무릎을 굻을 만큼 서양의 과학기술은 우수한 것이다. 최근 대국의 동해 연안으로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는데 제일 위에 장하가 있고 밑으로 산동반도가 있다. 그 밑에 상해와 복건성이고 제일 밑이 광동성이다. 광동의 홍콩이나 마카오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는데 서양인들의 출입이 자유로워 국제도시를 실감한다. 상하(常夏)의 땅에는 악취를 풍기는 과일이 나는데 먹을수록 맛있다. 복건성의 동쪽은 중국 최대의 섬 대만으로 원시림이 가득한 복판에 높은 산이 솟아있다. 거기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필리핀의 마닐라가 있고 바나나라는 달콤한 과일이 지천이다.

“그대가 그것들을 그려줄 수 있겠는가?”

해박한 지리 지식이 연일 대신들의 화젯거리가 되던 중 꼭두 새벽부터 샌님 같은 상이 시킨 출부였다. 일견 공초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쓱한 관리가 엉거주춤 앉아 문초를 하고 있다.

“지도를 말입니까?”

“그렇소.”

죄인이라도 호칭도 ‘그대’로 바꾸고 존댓말을 다 쓴다.

“어던 용도로 쓰시려고 하십니까?”

“나는 공판이오, 공조에 세계지도 하나 있어야 할 것 같소.”

“알겠나이다.”

“두 장을 그려주시오. 상감께 장계 올릴 것이고, 하나는 공조에서 보관할 것이오.”

“문방사우와 철필과 물감을 준비해 주십시오.”

“참, 병조에서도 원할지 모르겠소!”

“군사용으로 그리기는 싫습니다.”

누가 봐도 극형을 면키 어려운 죄목이었다. 조선 최초의 탁덕이라는 것도 확보한 문초자들 먼저 “네가 그 김대건 신부인가?”라며 호칭을 써왔다. 그런데도 공초는 한양에서 총 32차례나 계속됐는데 지적 호기심에 끌린 대신들이 자청해 왔다. 어떤 땐 심문이라기보다 좌담 같았다. 나와 엄수도 차츰 김장이 풀려 이러다간 두 발로 걸어나갈 수 있겠다 싶을 무렵이었다.

“이것이 네가 쓴 편지이냐?”

얼음장 같은 외모의 의금부 전담 공초관이었다. 한눈에 관록이 묻어나는 것으로 보아 문초장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상이다.

“그렇습니다.”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누구이냐?”

“제 친구 베르뇌, 메스트르, 리부아입니다.”

“무엇하는 사람들이냐?”

“중국에 파견된 서양 학자들입니다.”

서학(西學)으로 통하니 서양 학자들이기도 했다.

“무슨 내용을 썼느냐?”

“친구로서 안부를 물었고 저의 근황을 전했으며 기회가 된다면 조선에도 서양과학을 가르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무어라, 우리가 쇄국을 하는데도 그런 말을 했느냐?”

“언제까지 모든 문을 닫아놓을 수만은 없는 줄 압니다.”

“네놈이! 감히 누굴 훈계하느냐? 여봐라, 주뢰를 틀어라!”

그동안 대신들의 호의가 고깝기라도 했을까, 순전히 사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두 군졸이 탁덕의 정강이에 끼인 지렛대를 엇갈려 비틀자 뼈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나도 이미 저 고통을 잘 안다.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 했지만 통증 끝 온몸이 공중으로 솟구쳤을 땐 어땠는지 장담할 수 없다. 형틀에 꽁꽁 묶여서도 수직으로 으르다 뚝 떨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고문은 이렇게 사람의 정신과 육신을 분리해 놓는구나.’ 조선 천주교의 짧은 역사 속 수많은 신도들이 주뢰 앞에서 당해야 했던 고통을 탁덕도 온몸으로 재삼 알아갈 것이다.

“죄인 김대건, 조선을 해할 목적이렷다!”

“나는… 나는 누구보다 백성을… 백성을 위하는 사람이오.”

백성 앞에 ‘도탄에 빠진’이란 말은 속으로만 삼키는 듯하다.

“아무튼, 편지의 내용을 빠짐없이 언문으로 번역하렷다!”

한양으로 이송된 지 한 달이 되어간다. 탁덕은 두 발목이 쇠사슬에 묶였으면서도 한창 ‘세계지리개설서’라는 책자를 집필 중이다. 극동부터 동남아를 직접 가보고 지도를 그릴 만한 사람이 팔도에 한 명도 없음이었다. 탁덕을 큰 학자로 여겨 가능한 신지식을 많이 빼내려고 했다. 하루에 열네 번이나 출두했던 날도 있다.

“이자도 같이 투옥시킵니까?”

“보나마나… 한패 아니겠나?”

형리들의 오가던 소리 끝에 옥문이 열리면서 피투성이가 된 사람이 던져졌는데 나는 그를 보고 기절초풍할 뻔했다! 아무리 못 알아볼 정도로 망가졌지만 심장이 먼저 놀라 뒨 임치백, 나의 아버지였다. 한강변에서 장사를 하실 아버지가 만신창이가 되어 대역이나 오는 금부에 투옥된 것이다. 아버지는 나를 알아보더니 성룡아, 하며 얼굴을 감싸시고 한참을 흐느끼셨다. 그날 우리 부자는 밤을 새워 자초지종을 나누었다. 아버지는 내가 순위도에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곤 ‘성룡이는 그저 배의 주인으로 김대건 신부를 승선시켜 주었을 뿐 이번 사건과는 무관하다. 내가 가서 진위를 밝히겠다.’며 해주 감영을 찾으셨다. 해주에서 이송되던 아침, 환청이려니 여겼던 소리는 진짜 아버지의 육성이었다. 예전부터 안면 정도나 있었던 감사는 아예 만나주지도 않더니 그길로 여기까지 오게 됐다는 것이다. 얼마나 심한 고문을 받았는지 온몸이 걸레처럼 너덜너덜하였다.

“아버지 이분이 김대건 신부님입니다.” 나의 소개로 그렇게 두사람이 몇 마디 인사말을 나누었을 뿐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꺼져가던 눈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예 나를 제쳐두고 그때부터 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틀이 지나도 그칠 줄을 몰랐다. 사실 아버지는 가족이 천주교 하는 것을 묵인하실 뿐 당신의 입교는 미루고 있었다. 아버지가 투옥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지금부터 천주를 믿겠습니다. 너무 지체하였습니다.”

탁덕에게 고백하는 아버지는 갓 태어난 어린아이처럼 맑았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란 “자식 중에는 유식한 자식도 있고 무식한 자식도 있습니다. 무식한 자녀라고 효도까지 못하란 법은 없습니다. 나는 기초 교리도 모르는 무식한 자녑니다. 그너나 하느님의 효성스런 자녀가 될 것입니다.”이었다. 탁덕의 눈에서도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세례명을 요셉이라 합시다. 임 요셉 형제님, 당신이 투옥된 것은 특은입니다. 더한 효성으로써 보답합시다.”

이 ‘특은’이란 말에 혼란스러워진다. 저렇게 성한 곳이 없고 대 꼬챙이와 주뢰를 밥 먹듯이 당하게 된 것이 뭔 특은이란 말인가, 내가 속으로 이런 소릴 하는 중에도 둘은 손을 잡고 있었다. 아버지의 변화에 대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처지가 돼버렸다. 나를 구하려다 던져진 옥에서 더 밝게 지내시니 말이다. 며칠이 지나고 형과 형수가 면회 왔을 때도 우린 이상한 말들만 나누었다. 기뻐하지도 못하고 슬퍼하지도 못했다. 아버지가 흉측한 몰골로도 싱글벙글하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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