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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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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차쿠의 아침-배주인 임성룡(8) 날짜 2015.05.19 10:56
글쓴이 관리자 조회 217

탁덕의 말로는 작년 중국에서 조선으로 출항할 때 구경꾼들 때문에 귀찮았다고 했는데 지금 새남터에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모여든 군중에겐 오히려 기꺼운 듯했다. 은은한 안색이란 흡사 ‘이 시간 한 사람에게라도 감화를 주어 작은 씨앗 하나 뿌려줄 수 있다면 그대들을 귀한 손님으로 맞이하오.’하는 빛이다. 오래전 신학교 입학이 정했을 때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는데 탁덕은 지금을 그 시절로 여기는 듯했다. 사랑과 연민을 담은 눈으로 한번 둘러보았다.

“대역죄인은 최후로 진술하라.”

탁덕은 입안에 가득 침을 모아 넘겼다. 되도록 목소리가 멋지게 들렸으면 하는 것, 단정하고 호감 있게 보이려 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는 마지막 소개의 자리였다.

“나의 생명은 최후에 도달하였습니다. 내가 외국인과 사귄것은 다만, 우리 종교화 천주님을 위하여 그랬을 뿐입니다. 나는 하느님을 위해 죽으니 내 앞에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사후에 영원한 복락을 얻으려면 천주교인이 되십시오. 천주님을 알아 공경하여 자기 영혼을 구하는 것이 인생의 의미입니다.”

탁덕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형리들이 옷을 조금 벗기더니 푸욱, 얼굴에 물을 뿌렸다. 잇달아 확, 하얀 횟가루도 뿌린다. 다른 두 형리는 각기 화살촉 한 개씩을 양 귀에 꽂았다. 아파했다, 아파하지 않았다. 손과 발이 대못으로 뚫린 그분의 시간을 생각하는 듯하다. 관례에 따라 긴 막대기 두 개를 탁덕의 옆구리에 끼워 강제로 일으키더니 어깨에 들쳐메고 세 바퀴를 돌았다. 구경꾼들에게 ‘잘 보라, 죄를 지으면 이렇게 된다!’라는 군문효수형의 한 절차다. 그러고는 무릎을 꿇려 머리카락 끝에 맨 줄을 왼쪽 깃대 구멍에 꿰어 당기니 머리가 번쩍 들렸다. 능수능란했기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있었다.

드디어 북소리가 난다. 회자수들은 아까부터 술을 마셔댔는지 얼근해서 칼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둥!둥!둥!’

처음에는 북소리가 느리게 울렸다. 탁덕은 나직이 외쳤다.

“예수님, 저를 받아주십시오.”

‘둥!둥!둥!’

“스테파노,베드로,아녜스 모든 순교자들이여, 조선의 후배가 감히 인사 올립니다.”

‘둥!둥!둥!’

“아버지, 아버지…이제부터는 제 몫입니다.”

스물다섯 살밖에 안 된 반백머리의 탁덕이 그렇게 말해버렸다. ‘지금까지는 하느님의 영광 위해 죽을 고생으로 살았는데, 이제부터의 시간은 제 몫입니다. 영원한 휴가가 시작되려 합니다.’이런 뜻에 다름도 아닐 것이 치명자들은 한가지였다. 함께 옥살이를 하다가 사형 날짜가 잡히면 이구동성이었다. ‘축하한다. 이제는 그 무시무시한 고문도 끝.’

‘둥!둥!둥!’

북소리가 빨라지기 시작하였다. 횟가루가 덕지덕지해서 눈을 뜰 수는 없었지만 회자수를 향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어떤 자세를 해야 일하기 수월하신가?”

회자수 중 한 명이 중얼거렸다.

“마치…개선장군 같네.”

390년 전 바로 이 자리에서 같은 효수로 순국한 성삼문도 승리에 찬 모습만은 아니었다고 했다. 조선 절개의 화신도 막상 죽기 전에는 깊은 허무를 읊었다는데 ‘선비들의 지주도 그랬다는데 이 김대건이라는 자는 얼마나 개선하는 모습인가.’하는 듯 주춤 주춤 우두머리 회자수가 첫 칼을 내려치지 못하고 있었다.

‘두둥!두둥!둥두둥!’

‘두두두!’

‘두두두두!’

북소리에 가속이 붙었다. 순간 눈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북쪽 그 방향이었다. 아무리 하늘나라라고 해도 양업 부제와 함께해야 좋은가 보았다. 그곳에 가있는 것뿐이다. 추억의 장소를 미리 보아둘 때처럼 지금도 ‘먼저 가있을게.’하는 듯했다. 탁덕의 입에서 이 한마디가 더 나왔기 때문이다.

“업아, 어여 와!”

순간, 첫 회자수의 칼날이 내리쳐졌다. 두 번, 세 번, 탁덕의 목은 여덟 번째 칼에서야 완전히 끝이 났다. 9월 16일 오후 3시쯤이었다. 군문효수라는 말처럼 군사들은 탁덕의 머리를 새남터 군문 앞에 높이 걸어놓았다. 대개 사형수의 사체는 형장에 두었다가 사흘 후엔 장사 지내도 되었는데 탁덕의 시신은 특별지시로 현장 매장되었다. 잘라진 머리를 다시 목에 붙이고 홑조끼와 무명 바지를 대충 염하는 듯이 입혀 바로 묻어버렸다. 어영청에서는 교인들이 시체를 거두어다 성역화할까 봐 밤낮을 감시에 부쳤다. 10우러26일, 40일이 넘어서자 허술해진 틈을 타 열일곱 살의 청년 이민식 빈첸시오가 150리쯤 떨어진 미리내 선산에 안장하였다.

나는 그저 이 모든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탁덕을 위해 무언가 해득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현장을 뜨지도 못한 채, 밑 터진 자루처럼 한쪽에 버려져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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