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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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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차쿠의 아침-선장(1) 날짜 2015.02.24 16:28
글쓴이 관리자 조회 233

?선장(금가항 성당 오전10시)

?“감사합니다.”

?“모라고라?”

?“잘 기다려 주셨습니다.”

?“이것도 전문직 아니당가, 직업정신!”

?“루 선장님, 멋집니다.”

?“김 슨상도… 마음이 겁나게 가벼워 보여잉.”

?루 선장의 배는 이른 계절풍을 타고 쏜살같이 미끄러져 내려간다.

?대건의 안색이 한결 홀가분해 보였다. 남하하는 배를 따라 남쪽으로 돌리는 얼굴에 이제부터는 상해다 상해, 하는 심경의 변화가 읽혔다. 당초 계획대로 척척 진행될 때의 자신감이다. 며칠전 장하 쪽으로 북상할 때만 해도 좌불안석이었는데 지금은 무거운 짐이라도 내려놓은 듯 아무 꺼릴 것이 없어 보인다. 백가점이라는 곳에서 하룻밤 사이 뭔 회포를 풀었는지 몰라도 마치 오랜만에 혈육의 정을 주었거나 신뢰를 받은 사람의 안정감이 젊은이에게서 배어 나온다. 어쨌든 대건의 얼굴이 가벼우니 루 선장의 기분까지 순풍의 돛단배다. 다 돈 받고 하는 장사지만 배위에서야 손님이 이웃이요 사촌 아닌가. 막 대건에게 감사하다는 인사까지 받았지만 루 선장은 진짜 장하에서 한눈도 팔지 않고 있다가 제 시간에 출항시켜 주었다. 이제 상해의 오송항에 닿기만 하면 만사형통, 8월 11일 저녁까지 도착하면 된다고 하니 이만 같으면 중간에 한 군데 더 들러가도 될 시간이다.

?“어이 김 슨상!”

?“….”

?“근디 어디 아퍼?”

?“….”

?대건은 대답 대신 손사래를 쳐 보인다.

?“참말 벙어리가 된 것 같어브러?”

?“….”

?이번에도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이다 살짝 웃는다.

?“아따 거시기하기는… 알았당께!”

?루 선장은 솔직히 좀 심술이 났다. 대건이 갑자기 말이 없어진 것이다. 물론 상해까지 가는 동안 피정인가 뭔가를 한다는 얘기였어도 이리 요상할 줄은 몰랐다. 열흘가량의 뱃길일 텐데 야릇한 노릇을 언제까지 할 것인가? 시간표라는 것도 짜놨는지 승려들이 하듯 염주 같은 것을 돌리다 말다 하는 되풀이가 사뭇 규칙적이다. 그러다가 바다만 보고 있을 때는 돌부처만 같다. 대침묵이라나 뭐라나 ‘긍게 벙어리 노릇이 고로코롬 재미있나교일?’

?하고 빈정대고 싶었다. 방금 멀쩡한 사람한테 어디 아프냐고 물어본 것도 그래서다. 앞으로도 부러 쭉 그래볼 심보가 작은 배에 달랑 세 사람밖에 없는데 항해사는 바닷길을 살펴야 하니 그렇고, 무슨 청승인지 아예 장승이 되어버린 것이다. 외톨이가 된 것만 같아 희소리나 던져보지만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지, 멀쩡한 사람 이상해지는 것도 일순간이다.

?한편으로는 잔뜩 분위기를 잡고 있는 대건이 멋져 보이기도 했다. 젊긴 해도 반듯하게 나오는 상이 난생처음 보는 인간 유형임에는 틀림없다.

?실은 대건이 오늘 아침을 들자마자 정색을 해왔던 것이다.

?“루 선장님… 지금 마음 수련 대침묵 중이니, 나 좀 도와줍시다. 이 염주 같은 것을 돌릴 때나 바다를 보고 가만히 있을 때는 말을 걸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이 오십이 되도록 이런 부탁은 처음이었다. 사찰의 승려들도 태워준 적이 있지만 대침묵을 지켜달라는 말은 없었다. 괴기넌 씹어야 맛이고 말은 해야 맛인디 참말로 대침묵이라니….

?루 선장은 여태 뱃일밖에는 모르는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바다에서 잔뼈가 굵어서인지 육지에서보다 바다를 배경으로 있을 때 매력이 배가 된다나 어쩐다나, 마누라가 쓸데없는 소릴 했었다. 나이 들수록 마누라쟁이들한테 쩔쩔매는 상해나 소주의 중년들은 부채 하나 들고 불쑥 나온 배를 뒤뚱거리며 걷는 것이 풍류라 했다. 루 선장은 몸에 군살 하나 없다.

?자랑할 것이라곤 아직까지도 튼실한 몸뚱이 하나, 툭 튀어나온 광대뼈의 돌출 부분이 목 아래를 타고 어깨까지 그대로 이어져 힘을 쓸 때 울퉁불퉁한 연결들은 본인에게도 역동적인 것이다. 폭풍우와 맞서고 해적들과 싸워온 거친 바다가 이리 조각해 왔을 터다.

?사실 대건과의 만남도 폭풍과 해적, 이 두 가지가 공존했던 장소에서였다. 그러니까 정확히 석 달 엿새 전인 4월 30일, 현석문이라는 사람과 10명 남짓한 조선인들을 데리고 조선 제물포에서 상해로 출항했다고 했다. 3일 동안 몰아쳐 댄 폭풍우에 작은 배는 거의 부서져 식량도 종선도 모조리 버려야 했다고 했다. 간신히 목숨만 붙어 표류하는데 구세주처럼 자기 배가 나타나 주었다는 것이다. 물 한 모금 쌀 한 톨 먹지 못해 이리저리 떠밀리는 시체 꼴만 같았을 당시에도 그 모습만은 잊을 수가 없다, 김대건만은 우뚝 서있었다. 숨이 다 넘어가는 동료와 산더미처럼 덮쳐 오는 파도 중간에 서서는…. 사실 그만 아니었다면 내도 모른당게, 하고 지나쳐 버리려 했다. 조선 배가 침몰하든 몰살당하든 알 바 아니었다. 그런데 조선 청년은 가히 볼 만했던 것이다. 사지(死地)에서도 또박또박 중국말을 썼는데 비굴한 호소가 아니라 일종의 협상이었다. 머리털은 희끗희끗했지만 아직 젊은 사람이…솔직히 말하면 이 친구가 첫눈에 들었던 것이다.

?물론 삯으로 중국 돈 천 원을 받기는 했지만 떠있는 자체가 용한 배를 꽁무니에 매달아 상해 오송구까지 성심성의껏 끌어다 주었었다.

?문제는 산동반도를 지날 즈음이었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해적! 혹독한 파고를 넘자마자 산동의 도적 떼에 걸린 것이다. 요 몇 년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3년 전 영국군이 홍콩을 손에 넣고 상해와 남경은 물론 황하를 북상하여 천진까지 점령했을 때는 전 해상에서 쥐 죽은 듯했던 치들이었다. 근래 영국 군함 대신 소형 상선들이나 오가자 다시 기승을 부린 거였다.

?루 선장 역시 해적들이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맞짱 뜰 준비가 되어있었다. 자기의 조그만 배에 앙증맞은 함포까지 설치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볼 만한 것은 김대건이라는 조선 청년이었다. 좀 도와도 되겠습니까, 하며 루 선장의 배에 오르더니 바다에서 산전수전 겪은 자기보다 담담하게 해적을 향해 발포 준비를 했었다. 두려움도 없고 그렇다고 난폭함도 없는, 절도 있는 동작이었다. 그런 신속함이 없었다면 일전을 불사했을 테고 일단 작게라도 벌어졌으면 피해는 막대했을 것을 조선인 하나가 나서서 압도해 버렸다. ‘서양군대식 무력시위’로 말이다.

?해적들이 꽁무니를 뺐을 때 루 선장은 남자 대 남자로서 대건에게 정중히 악수를 청했다. “고맙소. 이제 상해까지는 진짜 별일 없을 거랑께.”란 밀이 절로 나왔다.

?“김 슨상.”

?중국인들은 손위이면 선생이라는 호칭을 쓴다. 손아래여도 존중하고 싶으면 흔히 찮게 ‘선생’이라고 하지만 방금 루 선장이 김선생이라 칭한 것은 불러놓고도 파격적인 것이었다. 뱃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아 좀처럼 쓰지 않던 상해나 소주의 말투가 나온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쌰오김(小金)이거나 펑요(친구)라고 불렀을 것이다. 아주 살갑게 굴려고 할 때나 형제라고 했겠고…. 그런데 막상 ‘선생’이라 불러놓고는 스스로 어깨가 으쓱해졌는데 그렇게 부르는 동안만은 상류사회의 일원이 된 것 같았다.

?물론 몇 달 전 첫 대면 때부터 이 청년의 기상에, 그리고 무엇보다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에 일견 반했기는 했었다. 그래도 그렇지, 방금 전의 ‘김 선생’이라는 호칭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것이다.

?“김 슨상, 아따 바다만 바라보고 있을게 무슨 도인 같네잉!”

?“….”

?“아참, 말 시키지 말라 캤지를!”

?“….”

?“알았당께… 쉿!”

?나무뿌리 같은 손가락이 두춤한 입술을 막자 대건도 미안한지 조금 웃는다.

?“알았어, 알았당께! 내 저쪽 가서 아예 오지도 않을랑께.”

??나중에서야 대건에게 들은 거지만 원래 대침묵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여럿일 때는 더 어렵다고 했다. 오랜만에 만나 하고픈 말들은 넘치는데 눈짓으로만 그런다는 것이 부자연스럽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처음 피정하는 사람들은 연방 실수를 한다고 한다. 아무 생각 없이 ‘안녕!’하고 좋게 인사하고 나면 ‘참, 지금 대침묵이지!’라고 자기도 모르게 중엉대게 되는데 이 자체가 침묵을 깨는 것이니…마주치면 얼결에 한마디 나올까 봐 아예 시선을 45도 깔고 다닌다고 한다.

?하지만 이틀 정도 그러다 보면 말을 안 해도 외롭지 않다는 것이다. 침묵이라는 광의의 언어를 통해서라는데 그 안에서 각자의 하늘까지 만난다니, 되레 편하고 자유롭다고 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이렇게 한나절만 침묵해도 뭔가 감이 오는데 사오십일을 한다면. 아무리 목석 같은 사람이라도 이십 일이 넘으면 내면까지 들어가 무의식을 볼 수 있다. 그 지점에서부터 타고난 좋은 천성을 재발견하거나, 기억보다 깊은 상처 하날 보듬거나, 아니면 그 내밀한 곳에 계신 분을 벌써부터 만나거나…. 여하간 많은 말로 부대끼며 살았으니 피정 때만큼은 고요로 들어가 보라는 뜻이다. 물론 이 난해한 얘기들은 대건이 루 선장을 구슬러 보려고 이리저리 풀어 한 것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런데 처음 들어보는 말들이 싫지만은 않았다.

?“아따, 참말로 고거 할 일 없네잉….”

?아무려나, 당장은 작은 배에 세 명밖에 없다는 것이다. 망망대해에 달랑 셋인데 하나는 키만 잡고 있지, 하나는 우두커니 바다만 보고 있지. 흐흥흥흥, 콧노래가 나오려다가도 혼자만 벙어리가 된 것 같으면 입이 근질근질 아주 미쳐버릴 지경이다. 말로만 그래보마, 한 것과 실제 그래보는 것은 달랐다. 별안간 답답해질 때는 ‘와!’하고 소리라도 내고 싶다. 처음엔 대침묵을 하겠다는 대건을 ‘젊은 사람이 도 닦는 상도 꼭 부처 같구먼.’하며 좋게도 보았다. 그런데 사나흘 우두커니 입맛만 다셔대자 그렇지도 않았다. ‘왐마! 도 닦으려면 지 혼자 닦을 것이제, 왜 나까지 벙어리 노릇을 하라는디?’ 사실이 그랬다.

?“아따, 거시기 입에서 곰팡이 피네잉!”

?그러나 혼자 중얼거릴 뿐, 항해사도 완전 찬동하는지 여간해 입을 열지 않는다.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기도 하다.

?“오메, 환장하겄네! 입 근질거려…. 어디 가서 하루 종일 땅 파는 게 낫당께.”

?파도소리에 흥정소리, 해적들의 고함 속에 살아온 루 선장이었다. 팔자에 없는 대침묵이라니 영 비위에 맞지 않는 노릇, 이쯤 되면 대건도 현실을 고려해야 할 것이 닷새나 남았는데 ‘침묵만 고집하다 내가 막 떠들기 시작하면 어쩔 셈이가.’ 루 선장 처지에서 보면 대건도 제 생각만 한다고 할 것이 피정의 ‘피’자도 이해하지 못할 환경을 살아온 사람이 아닌가.

?속으로 구시렁거리는 소리를 느꼈는지 대건의 입이 열린건 그때쯤이었다.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루 선장님. 식사 시간 한 시간씩, 아침 점심 저녁 도합 세?시간은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걸로.”

?“어라?”

?“예….”

?“그라믄 나야 허벌나게 좋지를! 그게 어딘데….”

“예.”

?“감사혀, 생각해 줘서.”

?“아닙니다.”

?“어이 항해사, 식사 때는 말여, 침묵 해제!”

?항해사는 대답 대신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확실히 말수가 적은 사람이다. 싱긋 웃는 거 하나로 모든 것을 대신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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