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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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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차쿠의 아침-짐꾼(1) 날짜 2015.03.31 17:47
글쓴이 관리자 조회 237

짐꾼(훈춘 오전11시30분)

“최 부제, 여기가 어디쯤이야?”

“범 요한 씨…훈춘 다 와 가지요?”

아무래도 양업 부제는 메스트르 신부의 질문을 일부러 범 요한에게 넘기고 있다. 엊저녁도 범 요한이 썩어지게 욕을 들어 둘 사이의 공기가 북만주에서 제일 춥다는 정월 삼구 기간보다 살벌하니까 어떻게든지 다리를 놓아보려는 심산이다. 그러나 이 인간이 재깍 대답하질 않는다. 메스트르 신부와는 영 배짱이 안 맞는지 원래 양업 부제와 범 요한,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만 나서려고 했던 길을 자기도 마침 방학이라며 메스트르 신부가 주도해 버렸을 때, 일그러지던 면상을 내 눈이 놓칠 리 만무였다. 얼마 전 버 요한 혼자 ‘참 나, 다 큰 사람을 사사 건건 혼내려고만 하니 신부만 아니면 대들고 싶은데…,’ 하며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훈춘 도착할라 카모… 두 시간쯤 더 가야 됩니더.”

마지못해 뱉는 대답이 눈 내리기 직전의 하늘처럼 찌푸려 있다. 이럴 땐 못 들은 체하고 넘어가는 게 상책이다. 그 성질머리에 뭐라고 했다가는 긁어 부스럼만 된다. 나이는 나보다 네 살이나 많은 게 변덕이 죽 끓듯 한다. 소팔가자 소신학교의 같은 사환 주제에 허드렛일이나 더 한다고, 또 지는 배울 만치 배웠다고 무시하고 들어올 때는 배알이 꼴려 못 봐줄 정도다. 그래도 직장에서는 오래된 내가 가끔 형님 형님, 하고 불러주면 어깨를 으쓱대며 헤헤거렸다. 그러나 지금처럼 기분이 별로일 때는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 꼴통이다. 양업 부제도 이런 점을 아는지 화제를 돌렸다.

“천 요셉 씨, 저 앞에 보이는 오르막에서 봇짐 교대해요.”

“일없슴다, 부제님.”

실제로 짐이 무겁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재깍 답해버렸다. 말이라도 고맙다는 생각에 앞서서 ‘저런 것도 어쩔 수 없는 천성이겠지.’하는 소리가 먼저 나온다. 냉하거나 습하거나 하나만 피해도 일없다는 동상을 눈 쌓인 길은 선두를 교대하던 통에 양업부제의 발가락이 제일 심했다. 흑갈색이 다 돼가면서 또 짐꾼의 짐까지 교대를 운운하니 저 천성도 상팔자는 아니다.

“요셉아, 그럴 땐 바로 씨에 씨에 카는 기다!”

범 요한이 갑자기 이죽거리는 것을 보면 지 딴에도 짐 보따리를 교대해 줄 마음이 없진 않은 모양이다. 메스트르 신부한테 서운한 거지 다른 일행에게는 별 감정 없다는 걸 보여주려는 눈치다.

“이번 경원에서도 육로를 못 찾으면 우리도 대건 신부처럼 해로 쪽을 보자고.”

화제를 원래대로 돌려놓는 메스트르 신부의 열굴에 하루빨리 조선에 들어가려는 조바심이 엿보인다.

우리 일행은 지금 소팔가자에서 장춘, 길림을 지나 훈춘으로 향하고 있는데 두만강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가는 길을 알아본다는 몇천 리를 거징 한 달 가까이 걷고 있다. 길잡이 범 요한이 앞장섰고 그 뒤를 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 그리고 맨 뒤에 내가 짐꾼으로 따르고 있다.

만주 쪽의 여행은 이때가 제격이라 했다. 영하 30도의 살을 에는 칼바람만 제외하곤 강이란 강이 모두 얼어붙기 때문에 아무데로나 가면 길이 된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원체 춥다 보니 지나는 동리마다 참견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다. 재작년 1월 김대건 신부가 탐색하고 왔다는 두만강변의 경원 시장 입국로를 살표볼 참인데 어쨌든 거기는 조선땅이니 잘하면 깊숙이 들어갈 방도를 찾을지도 모르고, 최소한 상인들에 섞여 조선 소식 정도는 들을 수 있다고 했다.

“대건….”

메스트르 신부의 입에서 이 두 글자가 튀어나오자마자 양업 부제의 오른손이 슴관처럼 턱 주위를 만지고 있다. 작년 성탄 무렵, 친구인 김대건 신부가 상해에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모시고 조선 한양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꼭 저랬었다. 표정은 흡사 ‘대건아… 역시 큰일을 해냈구나, 건강은 한거지…?’ 하는 듯했다.

솔직히 작년 8월 중순, 양업 부제도 김대건 신부의 사제서품에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내가 배운 건 없어도 눈치 하나로 먹고사는데, 그날 점심식사도 거르며 종일 성당에 앉아있던 거로 안다. 천주교 부제라는 신분이 어줍은 것이 성직자이긴 해도 아직 신학교를 졸업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뜻 어른들에게 청을 넣지 못했을 거다. 어쨌든 김대건 신부 이름만 나오면 짠한 눈빛이 되면서 턱 주위를 더듬는데 무슨 간절한 기원이라도 보내는 것인가?

“최 부제도 들었겠지만 훈춘, 경원 양쪽 다 삼엄한가 봐! 사실 대건 신부도 개장 통에 밀입국했던 거지 뭐.”

“네, 그때 대건 신부의 모험담, 다 재밌게 들었잖아요!”

지금 메스트르 신부와 양업 부제가 나누는 이야기는 나도 2년 전 겨울, 당시 김대건 부제한테 들은 적이 있다. 조선의 경원장에 가서 교회의 밀사들과 접선했는데 대건 부제는 장사꾼으로 위장해 있었고 밀사들 역시 조선 상인으로 위장해 있었다.

조선에 들어갈 수 있는 육로는 딱 두 군데로 정해졌다는데 여기 두만강변의 경원시장과 저 압록강변의 변문뿐이라고 했다. 지금 변문에는 통행증 심사가 엄격해졌고 기중 경원만이 만만하다는데, 만약 국경의 다른 곳에서 얼씬거렸다간 현장에서 사형에 처해지거나 노예로 팔려간다는 것이다.

메스트르 신부는 계속 양업 부제를 보면서 말했다.

그런데 좀 심하다! 일 년 장이 고작 하루 만에 파한대서야… 하루래봐야 네댓 시간 될라나?“

“지난여름 영국 배가 한강에서 무력시위를 했고 프랑스 배도 소란을 피웠대요. 철통 쇄국이래요.”

우리도 조심하자고, 여기 주둔한다는 군인 수백 명…조금 전 초소 군인들 봤지? 눈찌가 보통 아니던데?“

“상인 행색 들통 나면 좋진 않을 거예요.”

이맘때 한 번 열리는 경원장은 우리 중국인들로 말하면 길림부터 천 리 길을 마다 않는 장꾼들이 수두룩했다. 주로 개, 고양이, 담뱃대, 사슴뿔, 구리, 말, 노새 같은 것을 가져와 조선 상인들의 바구니, 가재도구, 쌀, 밀, 돼지, 종이, 돗자리, 가죽제품들과 교환한다.

“메스트르 신부님, 훈춘에 거징 다 온 것 같슴메다.”

아직 멀리 보이는 곳이라도 가리키며 부러 알찐거려 본다.

“그래 천 요셉… 경원장은 모레니까 그동안 훈춘에서 묶자고, 경원서 가까운 데가 좋지 않을까, 최 부제?”

“동강자라고 했나요, 길잡이 씨?”

양업 주제가 이번에도 범 요한을 끼원주자 인간이 아직 여든 댓 발이나 나온 입으로 삐죽거렸다.

“뭐… 그라든지예!”

메스트르 신부가 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참 최 부제, 재작년 김대건 신부가 조선 밀사들을 만났다는 방법?”

“손엔 흰 손수건 들고 허리엔 빨간 복주머니 차는 거요.”

“우리도 그래보지 뭐?” “안 그래도 한양의 별도 지시가 잇을 때까진 동일하다 했어요.”

때를 놓칠세라 나도 말 무르팍을 디밀어 본다.

“이러다 조선교회 상징물 되는 거 아임메까?”

밀사들의 만남은 듣기만 해도 간담이 서늘했다. 재작년 경원다리 밑에 있었던 밀사들도 일견 대건 부제를 알아봤다고 했다. 8년 만에 만나 대번 조선의 첫 성직자로 잘도 장성해 주었다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도 멀리서 서너 시간 지켜만 봤다는 것이다. 결국 대건 부제가 말에게 물을 먹이려고 경원 다리 밑으로 300보가량 걸어 내려왔을 때야 슬쩍 다가와 흥정하는 척 하더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조선 교우들은 대단하다. 한 달 전부터 오매불망 기다렸으면 보자마자 손이라도 덥석 잡앗을 텐데, 그렇게 조심하는 걸 보면 지금 상황이 만만치 않다는 뜻이다. 나는 새삼 중국인으로 태어난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동시에 현재 굶지는 않게 해주는 신학교 직장에서 밥값은 제대로 하고 있나, 하는 구질구질한 생각도 났다.

“무슨 비밀 첩자 접선하는 거 같잖아!”

“더하면 더했지요.”

그렇게 조심스레 만나고도 이따금 가축 얘기를 했다는 것이다. 소 한 마리에 백 냥에 파시오, 백 냥에는 안 되오! 지나가는 사람한테 장사꾼으로 보이기 위함이었다.

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가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나와 범 요한은 터덜터덜 피곤한 발걸음만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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