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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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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차쿠의 아침-짐꾼(2) 날짜 2015.03.31 18:07
글쓴이 관리자 조회 282

“와, 드디어 훈춘이네!”

틀림없이 양업 부제는 너스레를 떠는 중이다. 벌써 보름 가까이를 혼자 저러고 있다. 메스트르 신부와 범 요한 사이가 워낙 서먹하니 어떻하든 분위기를 띄워보려고 “훈춘이네!” 한 것이다. 여느 때 같았으면 이런 몫이야 으레 범 요한의 차지였다. 나 역시 메스트르 신부의 눈치만 보며 꿔다놓은 보릿자루로만 있었더니 양업 부제가 다 그런 몫을 맡고 있었다. 속으로만 그저 ‘중간에서 용쓰시네….’한 뿐이다.

상대방을 가장 빨리 알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여행이라 했다. 하루 온종일 붙어 다니며 먹을 것, 쉴 곳, 볼 곳을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와중에 사소한 걸 가지고도 토닥거리기 십상이다. 그런데 지금 메스트르 신부와 범 요한을 이번 여행 기간뿐만이 아니라 지난 몇 년간의 불만이 곱빼기로 쌓여있는 상태였다.

“훈춘 동남쪽 끝이 경원이랑 가까우니 거기서 묶기로 하지요?”

양업 부제답지 않게 방금 전 한 이야기를 또 한다.

메스트르 신부 역시 편승했다.

“그래 동강자라고? 반 시간은 더 가야겠네….”

살인적인 한파에도 거리에는 많은 사람이 운집해 있었다. 한창 투계판이 벌어져 변족(한족의복)쟁이와 변자(만주족 머리 모양)쟁이가 뒤섞여 야단법석이다.

“하기야 조선이 허락한 일 년에 하루 있는 날이니, 여관 잡기도 힘들겠는걸?”

“대목자이라서요, 그래도 이틀 먼저 왔으니까요.”

훈춘은 묘한 구석이 있는 소도시였다. 중국에서 보면 가장 동쪽인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의 최북단과 마주한다. 또한 러시아 땅도 지척이니 삼국이 접경하는 전형적인 변방도시다. 눈 뜨고도 코 베인다고 이런 데서는 정신 줄을 꽉 잡고 있어야 한다. 어기저기 군인초소가 널브러져 있고 그들을 상대로 하는 식당, 주막, 여관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다. 필시 이런 것들로 먹고사는 모양인데 그래서 군인들에게 외출이라도 금지되는 날엔 그림자 하나 없을 바닥은 그야말로 유령도시 같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해나 북경의 여느 거리 못잖게 북새통이다. 극한의 날씨에도 워낙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니 추위가 한결 가신다. 일년 장을 보려고 온 사람들이거나 그들을 호객하는 바닥치들, 그리고 또 군인들…. 평소보다 몇 배나 많은 병력을 동원시켜 놨다. 순식간에 약탈의 장이 될 수도 있는 국경의치안을 담당하는 그들의 무리가 지금 하나, 둘, 셋, 넷, 한창 위력 과시 중이다. 우리는 길가에서 겨우 교자 하나 먹는 것으로 시장기를 달래고 계속 동쪽으로만 걸어갔다. 과영 당시 김대건 신부의 말대로 저 멀리 ‘동강자’라는 팻말이 나오는 것을 보니 이제 훈춘도 최동쪽인 듯했다.

“여긴 어떻게 해가 더 빨리 지는 것 같아요? 네 시도 안 되었는데 벌써 어두우니…. 여관, 서둘러야겠어요.”

인적이 뜸한 여관에다 젠장 무조건 싸구려만 찾으니 맨날 헛간 같은 데나 걸릴밖에, 노숙과 별반 다르지도 않다.

메스트르 신부와 양업 부제가 한방을, 나와 범 요한이 한방을 잡았다. 늦어지더라도 저녁밥 짐 정리 후에 먹기로 했다.

이튿날 잠에서 깨어난 것은 옆방의 소곤대는 소리 때문이었다.

“케스트르 신부님, 잘 주무셨어요?”

양업 부제였다.

“응…. 발가락은 좀 어떤가?”

“견딜 만해요.”

“돌아갈 길도 먼데… 저걸 어쩌누?”

“자비하시니 병나면 병난 대로 허약하면 허약한 대로 그때그때 다 좋이만 받으시겠지요.”

“자네 잘못하단 그게… 나병처럼 발가락이 썩어나간다네!”

“네, 제 몸이 제 께 아니니¨. 안 그래도 밤에 더운물 얻어 담갔었어요. 잘 관리해야….”

허술한 사내가 아닌 양업 부제가 야무지던 말씉까지 흐렸다면 딱 한 군데밖에 없다, 조선 생각일 게다.

“참말로…. 먹는게 시원찮아 더하겠지, 동상도…. 근데…어제…우리가 잔게 10시쯤 되나? 오랜만에 푹 잤네.”

도란도란한 말씨가 어릴 적 부모님이 아침을 지으며 새벽을 깨우는 소리처럼 나직하게 계속 들려왔다. 방음 같은 것은 기대할 수도 없는 방이다.

“저도 한 달 만에 두 다리 뻗고 잤어요. 혹시 코 골지 않았나요?”

“코는 저 범 요한이고… 잠꼬댈 한 번 하데? 김대건 하더라고….”

“대건이. 음… 이제 내일이면 경원 장날이네요?”

“글세,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어야 할 텐데….”

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는 아직 이부자리 속인 듯했다. 아무래도 아침 9시가 훌쩍 넘었다. 지난 한 달간 새우잠만 자다 오랜만에 어깨를 펴보았다. 예정보다 하루 일삑 왔으니 예서 이래 죽치다 모레 아침에나 경원시장에 나가보면 될 일이다. 옆방에서 다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메스트르 신부가 일어나 앉아 기도서를 펴드는 소리가 뻔하다. 만약 얼어붙은 북만주 벌판을 떨어가며 하루 일찍 도착한 전리품이 아니라면 늦게 기상한 자체를 스스로 용납하지 않을 그다. 기도서를 펴고서는 잠시 기다리는 것 같은데 함께 기도하지 않겠느냐는 무언의 제안일 것이다.

메스트르 신부는 엄격한 구석이 있다. 굳이 말한다면 외유내강이 아니라 외강내강 형이라 할까, 옆에서 지켜보기에 심할 정도로 스스로를 다그쳤다. 조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사서 고생이었다. 다른 사람이 보든 안 보든 정해놓은 규율대로 철저히 사는 것은 좋은데 문젠 남에게도 비슷한 수준을 요구하니까 종종 삐걱거릴 수밖에. 신학교 교장이다 보니 그냥 말해도 될 걸 명령조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아직 세상 모르게 곯아떨어져 있는 저 범 요한, 늘 이랬다저랬다 하는 인간이 언짢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메스트르 신부가 지금 양업 부제에게 같이 기도하자고 기다려 주었다면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는 사람에게나 보이는 파격적인 몸짓이다.

양업 부제가 부스럭거리며 이불을 빠져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바깥 거리 쪽에서 들리는 것보다 작은 염경이 나기 시작한다.

“저 사람들… 아직 꿈나란 것 같은데, 최 부제가 깨워! 대충 씻고 식사하러 가자고….”

“어디서 먹지요, 그런데?”

“요 앞, 사거리식당 가지 뭐!”

기도를 마치자 두 사람은 하루 일정까지 상의하는 듯했다.

“요한 씨, 범 요한 씨? 둥근 해가 떴습니다. 중천까지 떴어요!”

양업 부제가 범 요한의 이름만 부르기에 나는 계속 잠이나 자는 척했다. 곁에 누운 인간은 그렇게 잤으면서도 피로가 덜 풀린 모양이다.

“요한 씨, 훈춘 담배 맛은 어떨랑가? 특별히 한 대 사드려 볼까나?”

“아, 예에…부제님 일어납니다.”

인간은 정말 골초 중의 골초다. 신학생 때도 동료들이 새벽 기도 때마다 못 깨우기 일쑤였다고 했다. “그러다간 신학교 쫓겨날지도 몰라….” 해도 으엉…으엉…할 뿐이었다. 한번은 옆 친구가 “야, 내가 혼났어, 옆에서 안깨운다고,”했더니 그제야 단박에 깨울 수 있는 비방을 일러주는데 “으어¨나는 자다가도 누가 담배 하나 때자고 하면 벌떡 일난데이!” 제 입으로 이 얘기를 떠벌리고도 양업 부제가 고 방법을 쓰니까 또 입술을 뻐금대며 일어나는 상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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