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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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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차쿠의 아침-짐꾼(3) 날짜 2015.04.06 18:44
글쓴이 관리자 조회 232

“아하, 11시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자리가 없네!”

우리는 메스트르 신부가 말한 식당으로 들어섰다.

“저기, 한 자리 있지 않슴메까!”

나의 한마디에 구령이라도 따르듯 주르르 빈자리로 향했다.

“뭐 먹을꼬?”

오랜만에 범 요한이 눈을 반짝였다. 푹자고 나 허기지기도 하겠지만 한 달 만의 제대로 된 음식 앞에서 눈구녁 불이 댕기는 모양인데, 먹을 때만 저러는 꼬락서니가 메스트르 신부에게 곱게 보일 리 없다.

“뭘 묵노? 도우빠오, 수안차이.”

아무리 그래도 저 인간은¨ 좌장이라도 된 양 거들먹거리며 차림표를 훑고 있었다. 나는 곁눈질로 메스트르 신부의 눈치부터 살폈다.

“아니, 아니! 음식은 최 부제가 시키지 그래?”

메스트르 신부의 말투가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위기는 다시 머쓱해졌다. 커다란 눈이 게슴츠레해지더니 좀 전까지 자라처럼 쑥 나왔던 목이 쏙 음츠러든 대신 아랫입술은 어든댓 발 튀어나왔다. 이럴 때의 입은 꼭 ‘주둥이’다.

“신부님, 요한 씨가 정한 것이 그래도 우리 입에 맞는 것이네요?”

“그래? 최 부제 마음대로 해!”

“오두빠오, 수안차이.”

“알았습니다. 도! 수!”

종업원은 주방 쪽에 큰 소리로 외쳤다.

주문과 동시에 다시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음식 나오기를 기다리는 지루함까지 더해지는 중에 ‘내 입은 입도 아이가, 왜 자구 씹나 말이다.’하며 점점 불길이 번지는지 범 요한의 낯이 붉으락푸르락해져 갔다. 양업 부제로선 어떡해서든 달래야 했을 것이다.

“참, 요한 씨한테 담배 한 개비 사준다고 했지?”

하면서 양업 부제가 일어섰다. 부제님 제가 갔다 오갔슴다, 하며 나도 자동으로 일어나는 척하며 말치레나 해본다.

“아냐 요셉 씨, 어제 봐둔 곳이 있어요.”

하는 양업 부제의 등짝에 메스트르 신부가 인사처럼 말했다.

“거, 담배도 안 피우는 사람이?”

“금방 올게요, 음식 나오면 먼저들 드세요.”

양업 부제가 문을 닫고 나간 직후, 못 보던 식당 애가 다가와 섰다.

“손님들, 음식은 시켰나요?”

꼴을 보니 금방 주문했는데도 주방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여느 때 같았으면 잠자코 있어야 할 메스트르 신부였다. 아직 중국말이 유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커다란 모자로 노랑머리를 가리고 있지만 파란 눈 때문에는 그냔 가만있는 것이 득이었다. 그러나…제멋대로인 범 요한 때문인지 직접 주문하려는 눈치였다. 최악의 경우 양인으로 드러나도 영국인은 아니지 않느냐는 투다. 고래 싸움에 끼어들 이유는 없으니 날 잡아 잡슈, 하며 모르쇠나 하려는 순간이었다.

“으응, 량더.”

메스트르 신부가 ‘두 가지’를 시켰다는 뜻으로 이미 그렇게 말해 버렸다. 범 요한과 사이가 좋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중국 말 하는 몫을 맡겼어야 했다. 종업원이 갸우뚱하며 되물었다.

“예? 차가운 음식을요? 량 더?”

“그래, 량… 더….”

초보자가 발음하면 중국말 ‘차갑다’의 ‘냉’과 ‘두 개’의 ‘양’ 발음이 비슷하다. 범 요한이 속으로 비웃는 것 같았다. 지금 말하는 사람은 두 가지를 시켰다는데 듣는 사람은 차가운 것이라고 들었지 않은가. 평소 같으면 ‘신부님, 그그는 그기 아이고 이금니데이.’하고 득의양양하게 나서줄 위인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기가 싫었을 것이다. 종업원은 동그랗게 눈을 뜨며 삼차 물었다.

“량더?”

“응, 랴앙….”

이때쯤이었다. 주변의 모든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되었다.

“으하하!”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니 웬 눈이 파란 사람이 어디서 중국말을 배웠는지‘두 가지’라고 하는데 종업원은 ‘이 추운 겨울에 무슨 냉한 음식이냐?’는 꼴이었다.

“하하하하!”

평소 같으면 재기 넘치는 우스갯소리다. 한바탕 웃어버리면 서로 좋을 일이었다. 그러나 범 요한은 구경꾼들이 우리를 조소하는 소리로만 들었는지 제법 큰 소리로 삐죽거렸다.

“니먼 수어 샤?”

‘당신들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사천 사람 입에서 갑자기 동북의 방언이 튀어나왔다. ‘샤’는 무엇이라는 동북 사투리인데 표준말 ‘샤’는 ‘샤과’의 준말로 ‘바보, 멍청이’라는 뜻이다. 범 요한이 종업원 쪽을 쳐다보았을 것이나 메스트르 신부도 보았다. 성격상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는 게 못 견디게 싫었을 것이다.

말이라고 하는 게 원래 좋을 때는 화자가 100을 이야기하면 110까지를 들으나, 좋지 않을 땐 표현도 80밖에 안 되지만 듣는 쪽에선 50으로 깎인다지 않던가. 언젠가 양인들도 관계가 좋으면 외국말도 쉽게 배운다고 했었다. 그 나라의 돌멩이까지 사랑하라는 것은 관계가 좋아야말도 쉬이 배워진다는 뜻임은 나 같은 무지렁이도 금방 수긍이 갔던 얘기다.

지금 메스트르 신부는 범 요한이 괘씸키도 할 건데 내가 보고 들은 것만 해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범 요한은 “앞으로는 잘할끼예, 한 번만 봐주이소.”하고 용서를 구했었다. 그런데 인간이 도무지 개선되지를 않았다. 보름 전에도 길림성내에서 예쁘장한 처자를 보며 얼마나 헬렐레하던지 급기야 지가 챙겨야 할 물건까지 빠뜨려 버렸다. 그때 나도 한마디 했더니 오히려 ‘똥 싼 놈’이 더 지랄을 떨었다. 결국은 메스트르 신부에게 불려갔는데 얼핏 들려오는 소리가 “술하고 여자는… 돌 보듯 하겠다 한 게 언제야, 이 사람아, 똑같은 입이지만 바로 한 말도 못 지기키는 주둥이야 주둥이!”였다. 그 후로 여기 훈춘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살얼음판이었다. 그런 범 요한의 입에서 ‘샤’라는 소리가 ‘바보’라는 소리로 전달된 것이다. 이쯤에서는 나도 나서려고 했지만 날 선 메스트르 신부의 음성이 한 발 앞섰다.

“뭐라고? 범 요한, 나한데 바보라고?”

“뭐라꼬예, 지금 뭐라카시는 깁니꺼?”

‘뭐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니 수어 샤?’ 다시 한 번 동북방언이 제멋대로 전달되었다. 직속상관한데 두 번을 연속 ‘바보’라고 한 셈이다.

“뭐라고? 이 사람이 지금?”

메스트르의 언성이 높아졌다. 눈빛은 이미 자애로운 신부의 것이 아니었다. 필시 그 무엇의 언어 장난 같았다. 이쯤 되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더러는 식사하던 숟가락을 놓고 우리 쪽을 구경했다. 무료하던 참에 눈요깃감일 것이 한 명은 파란 눈의 양인이고 나머지도 만주인 같아 뵈진 않는데 밥상머리에서 식구끼리 티격태격한 꼴이다.

“햐… 그 사람들 재미있네!”

우리 중국인은 천성적으로 남의 일에 관심이 많다. 만약 호기심에 꼬리라도 잡히는 날엔 하던 일을 중단하고라도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척 봐도 심술 사납게 뵈는 사내 하나가 메스트르 신부에게 물어왔다.

“당신 어느 나라 사람이오?”

“….”

메스트르 신부도 아차! 싶었겠으나 때는 늦었다. 아직 평정심이 찾아오지 않았거니와 잘못 입을 열었다간 더 꼬일 것 같아 재깍 말이 나올 수가 없었을 거다.

“갑자기 벙어리가 되셨나, 어느 나라 사람이냐니까?”

“….”

사실 그자의 눈에 얕보인 탓도 있다. 방금 전 얼굴까지 붉혔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사내는 바로 거칠게 나왔다.

“이 사람이 말을 씹네…. 내 말이 바닷가 조개껍데기보다 못하지?”

상황이 이쯤 되면 범 요한이 나서서 일을 수습해야 했다. 먼저 급한 불부터 꺼놓고 차차 화해해도 될 건데…. 그런데 이 화상은 지듬은 ‘그냥 가만히 있는 무엇’에 씐 것만 같다. 재깍 메스트르 신부의 편을 들어주기엔 별안간 벌어진 탓도 잇다. 내 심장도 팔딱팔딱 뒷면서 그냥 ‘어 어!’하고 있는데 고약하게 생긴 사내의 입이 다시 열렸다.

“이것들 봐라, 중국 사람 같잖게 보네! 말상댈 안 하겠단 거지. 천하가 바귀었단 말이지?”

사실 여기 구경꾼들이야 하루 벌어먹고 사는 이들이다. 훈춘까지 오면서도 얼마나 험한 일들을 겪었을까? 따뜻한 마음이라곤 저 밑바닥에 잠들어 버린 각박한 인생들, 누구 하나 상황이 조용히 끝나기보단 이참에 눈요기만 하면 되는 부류였다.

“양놈아! 중화가 그렇게 우스워졌어?”

하며 덤벼드는 불한당 같은 놈은 메스트르 신부 대신 왈칵 내 멱살을 틀어잡은 게 아닌가. 다리가 후들거리고 덩치의 우락부락 한 손 앞엔 하늘까지 노래졌다. 중화는 무슨 중화? 나도 중국인이지만 만만한 사람에게 애꿏은 분풀이를 잘한다. 막상 누 파랗고 얼굴 허연 양인의 멱살을 잡으려니 먼저 쉬워 보이는 쪽으로 일을 키우려는 속셈이다. 번쩍, 범 꼴통 면상에도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소란이라도 나면 순식간에 순찰 관헌들이 들이칠 테고 그러면 우리의 위장 행색도 탄로 나고 만다. 더구나 외국인이 끼어있다는 자체가 위약점이었다.

“아이, 미안합니더, 이거. 우리가 잘못했심더. 이 양반이 외국인이라 잘 알아듣지를 못해서 그래 됐네예.”

“너 이 사람하고 친구야?”

나이 차이랑 상관없이 중국에서는 다 친구라고 한다.

“예, 친구라예. 좋은 분이라예.”

“그런데 왜 오가는 말이 좋질 않은 거야, 내가 귀머거리나고? 진짜 친구 맞냐고?”

“하모 하모… 맞지예.”

이때였다.

“야 거기, 너희들 무슨 일이야?”

“움직이지 마!”

사복을 한 관헌이 군인 두 사람을 데리고 들이닥친 것이다.

“뭐야 싸우는 거야?”

“아님니다. 그냥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냥 이야기하는 것이 서서들 이래? 잠깐 초소로 가야겠다!”

예… 뭐라구요? 그 개뼈다귀 같은 치도 ‘이러다간 정말 건수 잡히겠네.’하며 놀라고 있었다.

이럴 때 수완 좋은 대건 부제라도 있었으면…. 관헌들이야 그저 점심값 정도를 요구해 오는 모양인데, 별것도 아닌 불씨로 난 사단이라 더 약이 올랐다. 양업 부제가 담배를 사서 식당에 돌아왔을 땐 이미 연행당하는 중이었다.

관헌들의 초소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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