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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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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유박해 때 동정녀들의 취회(여교우공동체) 활동-6 날짜 2005.10.26 10:59
글쓴이 관리자 조회 521
천주교에 입신한 부녀자들은 "남녀가 각처에서 모여 같이 앉아서 내방취회를 하였고 첨례송경을 하였으며 예배와 기도와 미사를 봄으로써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당대의 완고한 인습에 대립되는 행동을 하였다."
이와 같은 취회여인 사건은 기록에 여러 번 나타나고 있는데, 그와 같은 모임에서는 남녀동석 뿐만 아니라 양반에서 노비에 이르기까지 신분상하의 차별이 없이 한방에 동석하였다. 또한 취회에서는 모든 남녀교우들이 함께 내방에 앉아 강학회를 열었으며 주문모신부의 강론도 들었다.
이상과 같은 행위는 계급의식이나 남존여비사상이 투철했던 조선유교사회에서는 차별주의적 유교의 가르침을 완전히 무시하는 행위로써 윤리질서를 파괴하는 행위이며 민심을 현혹시키는 행위로 단죄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러한 행동은 남녀칠세부동석과 남존여비같은 전근대의식이나 봉건적 인습에서 여성을 벗어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가치관과 근대적인 의식을 지향케 함으로써 남녀평등을 실천한 효시였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행위가 실천된 것은 일부 천주교 여인들 사이에서였지만 당시 유학자들은 대단한 위협과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이며, 그들은 이러한 경향이 더둑더 그들 여인들에게는 절대로 가할 수 없게 되어 있던 법외의 형벌인 주뢰형으로 그녀들을 고문한다든가, 또 여성에게는 가장 모욕적인 유배형에 처한다든가 함으로써 앞세서 말한 유학자들의 초조감을 드러냈던 것이다.
당시의 부녀자들은 관료적 유학사회의 벽을 뚫고 천주교가 지닌 보편성을 이해함으로써 여성 해방에의 출구를 발견하였다. 즉 천주교 신자들은 모든 인간이 동등하며 양반이나 상민이나 노비까지도 모두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평등의식에서 남녀귀천을 불문하고 같은 이름으로 영세를 받아 사호(세례명)를 받고 같은 장소에 앉아 함께 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행위는 양반 계급사회에서는 절대로 허용될 수 없었던 패륜의식으로, 더욱이 숨 한 번 크게 쉴수 없었던 부녀자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이나 의식은 남녀관계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았는데 천주교로 입신했던 남녀신자들은 누구든지 한 자리에 앉을 수 있었고 서로 인격적으로 대화할 수가 있었으며 부부유별의 인습에서 있어서도 전통 유교 사회에서처럼 부부사이의 관계를 종속적 관계로서가 아니라 평등관계로써 실천하였다.
이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순이(누갈다)부부의 경우에서 보여지는데 그들은 부부관계를 '교우'나 '충우'의 관계로까지 발전시켰던것이다. 또한 강완숙의 경우에서도 새로운 남녀관계의 정립이 엿보이는데, 그녀는 교회 안의 중요한 업무를 남녀의 적성에 맞도록 분배하여 서로 의논하고 돕는 관계로 남녀관계를 발전시켰다.
이렇게 하여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신자들은 유교적 인습에서 오는 인간 불평등의 견고한 틀에서 깨어나, 그러한 관행이나 제도의 껍질을 벗기는 작업에 선도자들이 되었고, 특히 동정녀들은 그러한 시대적 사명을 실천하는데 앞정섬으로써 조선시대에 인간평등사상의 정신을 고취하고 실천했던 최초의 효시가 되었으니, 이러한 그녀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사적의미를 갖는 것으로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조선초기교회의 창설기부터 부녀자들의 공동체와 동정녀들의 공동체가 존재했음은 앞에서 이미 입증하였다. 그러면 여기서는 그러한 여인제회나 취회를 형성했던 일차적 목적은 자신들이 천주교의 교리나 진리를 배워서 남에게 전달하기 휘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즉 부녀자들의 종교 교육이 공동체 형성의 첫째 목표였다고 생각할 것이다. 따라서 공동체의 내용을 보다 확실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실천한 교육내용이 무엇이었는가를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목적의 달성을 위해서 우리는 먼저 조선왕조에 있어서 여성 교육의 상황이나 그 배경을 간락하게 나마 고찰하여 한국초기교회의 동정녀 공동체의 여성 교육 활동이 지닌 의미를 그와 비교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시데에는 제도적으로 여성을 위한 교육기관이 따로 없었다. 다만 남자만을 위해서 성균관이나 향교, 서원 등의 국립교육기관이나 사학이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여성들을 위한 교육 활동이 전혀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다만 여성교육의 목표가 남성교육의 목적과 전혀 상이하였기 때문에 그 방법을 달리하였던 것이다.
유교사회었던 당시에 있어서 여성교육의 첫째가는 목표는 부덕이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사람들은 부녀자들이 문자를 알거나 정사에 참여하는 일을 가장 큰 금기로 여기게 되었다.
또한 당시의 여성들은 외출이 거의 금지되어 있어서 항상 집안에서만 생활하였으므로 가정교육이 가장 중요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교육은 부덕을 함양시키기 위하여 그것의 근간이 되는 덕목들, 즉 부모를 섬기는 효도나 정절을 지미는 열녀의 덕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여성들에 대한 교육은 모든 여성들을 유교적 열녀로 만드는데 집중되었으며, 그러한 목표를 위해 [삼강행실도]라든지, 여성교육의 지침서인 [내훈서]라든가, 송시열의 [우암선생 계녀서]라든가, 이덕무의 [사소절]이나 해평윤씨의 [규범]등의 여성교훈서들이 서술 간행되었다. 요컨대 당시 여성 교육의 목적은 유학 정신에 입각한 현모양처의 양성으로 부부관에서도 주종관계를 강조하는 전근대적양상이 완연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초기교회 안에서 여교우들이 행한 교육의 내용이나 목적은 앞에서 말한 당시 일반적 부녀자들이 그것과 전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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