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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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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유박해 때 부녀자들과 노비들의 취회 활동-1 날짜 2005.11.03 17:45
글쓴이 관리자 조회 515
신유년 박해가 발생하기 전해인, 경신년(1800년)에 즈음한 조선교회의 상황을 황사영 백서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 해 4월 무렵이 되자 대부분의 교우들이 명동회에 가입하게 되었고, 이렇게 조직화된 신자들은 신공과 덕행을 쌓고 전교활동을 맹렬히 전개하여, 그 해 가을과 겨울 동안에 신자들이 현저히 증가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삼분의 이는 부녀자들이었으며 삼분의 일은 무식한 천민들이었다. 그리고 당시의 신자 중에서 여자교우들이 남자교우들의 두배 이상이 되었던 것은 주로 강완숙의 열성적인 전교활동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또 천주교에 대한 관측 사료인 [사학징의]를 살펴보아도 여신도들의 명단이 70여 명에 달하고 있으며, 이들 여신도 가운데서 20여 명은 주문모 신부와 직접 접촉을 가졌던 사람들로서 교회 안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들 가운데서 대표적인 인물들을 지적해보면 아래와 같다.
주문모 신부에게서 직접 영세를 받았던 강완숙, 한신애, 강경복, 김연이, 문영인, 윤점혜, 정순매 등과 직접 영세를 받지는 않았으나 교회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정복혜, 윤운혜를 비롯하여 양반 교우들의 노비로서 크게 활동했던 복접, 소명, 정임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당시 교회내에서 중요한 연락 관계를 맡고 있던 이 여교우들은 합리적이고 조직적으로 대사회 활동을 전개해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왕족, 사대부, 양반가의 부녀자들과 일반 서민층의 소사 및 과부 동정녀들과 노비 등, 그 구성층이 다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교우집단인 공동체를 조직.형성하여 효율적인 신앙 활동을 전개해 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는 함께 모여 기도하고 취사하면서 공동으로 생활했던 모임으로서, 그 중심인물들은 대부분 과부들이었다. 즉 청상과부인 김희인 자신이 일백오십량, 친구 기경애가 오십량을 내놓아 동료들과 함께 군기사 앞에 집을 마련하여 시숙모 이홍임과 또 친척인 이어인애기 등과 공동으로 생활했던 것이다.
한편 노비 복점의 문초 기록에 의하면 남대문 내창 앞 손만호의 집에서도 역시 여러 지방에서 온 과부 7,8명이 때때로 함께 모여 교리서를 읽어 익히고 기도를 하고 교리를 강론했는데, 거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양반사족가의 부녀자에서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했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한국초기교회에는 동정녀와 과부, 특히 청상과부들이 많았으며, 강완숙을 중심으로 하여 과부들의 모임인 '여인재회(女人齋會)' 혹은 '취회여인'으로 불려졌던 신앙공동체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학징의]에 의하면, 이들 즉 나이 어린 청상과부들인 김희인과 김경애, 이을인애기 등의 경우를 예로 보면 서로 한 방에 모여 앉아 천주학을 익히면서 신앙생활과 수덕생활에 전념하여 그침이 없었고, 주문모 신부를 만나기 위해 자주 강완숙의 집을 출입했다고 한다. 또한 이들은 여러가지의 천주교 교리서 및 서적과 성서와 성물을 숨겨두거나 매매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요컨대 초기 한국 천주교회에서 여성들의 신앙공동체가 수행했던 활동은 매우 다양했으며, 매우 조직적이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이들의 가장 중요한 활동은 집집마다 방문하여 신앙을 가지라고 권하는 선교 활동이었으며, 이들의 지도자는 물론 강완숙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활동들은 강완숙이 공동체로 부녀신자들을 조직화하여 일정한 기간동안 교리교육이나 여러 가지의 훈련을 시킨 다음, 그녀들을 전교사로 파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 여신도들은 교회내에서 여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뿐만 아니라 매월 6,7차례 혹은 10여 차례 남녀 교우들이 함께 모이는 첨례의 날에는 미사의 준비를 도맡아 했으며, 여기에서 강완숙은 강론과 교리해설까지 담당하였다.
또한 노비들도 갖가지 심부름 등을 하는 것으로 활동에 참여하였다. 이와 같이 첨례날에는 남녀노소,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한자리에 모여 기도문을 합송하였으며, 강완숙 이외의 다른 지도자 여교우들도 부부가 함께 강론을 하였다. 한 가지 예로 정광수는 그의 아내 윤운혜와 함께 첨례보는 장소를 만들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천주학을 강론하였다고 한다.
한편 [사학징의]등의 사료에 의하면 공동체 모임을 유지하고 있던 과부들은 서로 의지할 뿐 아니라, 불우하고 의지할 곳이 없는 청상과부들이나 노파들을 자신들의 집에서 함께 살게 하여 교리를 가르치고 입교시킴으로써 신앙을 갖게 하였다.
이제 우리는 문초기록 등을 통하여 부녀자들과 과부들의 명단을 하나하나 소개함으로써 그녀들의 활동상황과 과부 공동체의 인적 구성상태 및 당시의 대표적 부인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렇게 하면 당시 여성교우들의 활동이 어떤 양상으로 발전해갔으며 그 한계성이 무엇인가를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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