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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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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유박해 때 부녀자들과 노비들의 취회 활동-3 날짜 2005.11.15 16:00
글쓴이 관리자 조회 517
(8) 강복혜

한림동에 살다가 포청에 체포되어, 신유년 4월 9일에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그녀는 서소문 밖에서 살다가 남편과 사별한 후, 마음에 의지할 곳이 없어 햇는데 천주학을 하면 좋다는 말을 듣고 한림동 노씨의 아내에게서 처음으로 천주교에 대해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 집에 왕래했던 사람으로는 권철신의 여동생(아마도 權召史) 집의 노비인 구애와 남판서 집의 노비인 구월의 딸 박려 등이 있었으며, 이외에도 양청 김씨의 딸과, 사는 곳을 알 수 없는 탁가의 아내 등도 함께 교리를 배웠다. 그녀는 또한 교회서적의 매매를 담당했던 것으로 문초기록에 나타나있다. 요컨대 강복혜는 여러 노비들과 함께 교회의 연락사무를 맡아 능력을 발휘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특히 그녀는 양반집을 출입하면서 주로 천비들에게 포교활동을 했던 여인이었다.

(9) 이어인애기

앞서 처형된 김경애의 어머니로 김희인과 함께 살았다. 그녀는 신유년 3월 16일에 체포되어 4월에 보성으로 유배되었다. 남편이 죽자 의탁할 곳이 없게된 그녀는 남편의 외가친척인 임세풍의 집에서 살았다. 그때 도화동의 홍소사 집에서 그의 딸 김경애와 함께 천주교의 교리를 배웠다. 이때 그들과 왕래하며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은 충훈부의 후처 강씨녀와 그 집에 함께 살았던 다실아(다리아)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작은 여인 등이었다. 이어인애기의 모녀와 홍임 등은 성화와 성물을 벽동의 정광수 집에서 얻어다 팔았다.
문초기록에 의하면 그의 딸 김경애는 결혼을 하지 않은 처녀로서 거짓 허씨의 아내라고 하고 허가의 죽은 몸에서 혼수를 받았다고 하였다. 이어인애기는 자신의 딸인 김경애가 시집갈 뜻이 없으므로 그와 같은 꾀를 자신이 직접 가르쳐 주었다고 진술했으며 그리고 교주의 숨은 곳과 영세 및 교명은 배운것이 없어서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그녀 역시 다른 과부들과 함께 공동체의 한 일원으로서 딸과 함께 성물 판매 등의 여러 가지 교회 내의 사무를 도왔던 것이다.

(10) 이홍임

김희인의 시숙모와 한 방에서 같이 살았으며 신유년 3월 16일에 체포되어 3월 18일에 신지도로 유배되었다.
이홍임의 시조카딸인 김희인의 집에 살았던 것은 부모와 집이 없어서였으며, 3년 전(1797)부터 정광수의 아내 윤운혜에게서 천주교를 배우고 영세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각자가 돈을 내어 집을 사서 같이 교리를 배웠으며, 김희인은 먹고 자는 시간외에는 오직 학습에만 힘을 쏟았다. 그것은 맡은 교회업무가 많아서 함께 같은 시간에 기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김희인, 이홍임 등을 중심으로 하여 과부들의 공동체가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11) 김흥년

강완숙의 고용인으로 김희인의 집에 피하여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신유년 3월 16일에 신지도로 유배되었다.
김홍년은 본래 수원의 사곡 사람으로 여섯 살 때 부모를 떠나 상경하여 공자 고용인이 되었다. 부모와 남편이 죽은 뒤인 1795년에 그녀는 강완숙의 집에서 교리를 배워 영세를 받았다. 문초기록에 의하면 그 때 그녀는 중인 남교우인 최관천과 창동의 정생원과 벽동의 정광수 등이 강완숙의 집에서 모이는 것을 목격했으며, 그녀는 자신도 여러 차례 정광수의 집에 왕래했다 한다. 그리고 그녀는 강완숙이 체포된 뒤 의탁할 곳이 없게 되자 종부서리 임세풍의 집에서 지내다 체포되었다. 그녀는 심문장소에서 "소위 천주교 신부라는 다른 사람이 왔다고 들었으나 성명도 알지 못하은 일디다"라고 답변하였다. 그런 후에 그녀는 신앙을 고백하다가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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