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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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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손경윤(1760~1802 제르바시오) 날짜 2005.09.30 14:44
글쓴이 관리자 조회 388
손경윤(그의 漢字名을 景允이라 적은 기록도 있다) 제르바시오는 서울의 양가에서 태어나 안국동에서 약포를 경영했던 사람이다.
그의 집안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지 않지만, 딸 손 막달레나가 기해박해가 일어난 1839년 11월 17일(음력 10월 12일)에 순교한 기록이 나타난다. 조선 천주교회의 초기인 1790년(정조 14년)에 최필공(토마스)으로부터 천주교에 대한 교리를 듣고 입교한 그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으나, 이듬해 신해박해 때 체포된 후 일시적으로 배교하여 석방되었다. 이후 그는 자신의 나약함을 뉘우치고는 더욱 열성적으로 교리를 실천하였으며, 홍익만등의 교우들과 더불어 교회의 일을 보살피는데도 열심이었다.
그러던 중 회장으로 임명된 제르바시오는 자신의 직분을 매우 열성적으로 수행하였다. 회장의 직분을 다하기 위하여 그는 큰집을 사서 밖은 술집으로 꾸며 외교인들에게 술을 팔았으며, 안채에는 교우들을 모아놓고 그들을 가르치며 격려했던 것이다.
한편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후로는 열성적인 동료 정광수, 홍필주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신부를 모시고 첨례에 참여하여 교리를 배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최필공(토마스), 최창현(요한), 김이우(바르나바), 황사영(알렉산델) 등과 더불어 신부를 피신시키고 교우들을 돌보며 신앙을 지키기에 노력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제르바시오는 그의 뛰어난 활동으로 인하여 즉시 박해자들의 눈에 띄게 되었다. 이때 그는 박해를 피할 생각으로 약간의 교회 서적을 지니고는 동생 경욱과 더불어 이곳저곳으로 거처를 옮기며 생활하였다. 고생을 참아가면서 피난생활을 하던 중 그는 자기 대신에 아내와 자식들이 체포되어 고생을 한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포청에 자수하였다.
그는 포청에서 배교와 밀고를 강요하는 관리들에 의하여 심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어떠한 고통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신앙심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형조로 옮겨져 사형선고를 받고 참수되어 순교의 영광을 얻었으니, 째는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16일)로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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