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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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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유박해 때 동정녀들의 취회(여교우공동체) 활동-1 날짜 2005.10.19 11:34
글쓴이 관리자 조회 520
조선시대 천주교회 여교우들의 신유년 문초기록에서 취회여인이라고 불려졌던 동정녀들의 공동체와 과부들의 공동체인 부녀자들의 모임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많은 사료에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사건은 한국여성사 안에서 특기할만한 사실이며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많은 의미들을 가지고 있다.
즉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첫째로 전체 교회사 안에서 그들이 구현했던 동정생활이나 독신생활이 당시 조선유교사상과는 전연 상반되는 사상구조에서 생겨난 것으로써 이 정신의 기원이 어떻게 어디에서 수용된것인지 대략 보고자 한다.
더 나아가 이와 같은 동정에 대한 개념과 그 정신 체계와 실천행동이 당시 사회에 끼친 영향과 파문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규명해 봄으로써 초기 조선가톨릭 여교우들의 정신적인 기저(基低)를 밝히고자 한다.
다음으로는 이와 같은 부녀자들의 공동체, 특히 동정녀들의 공동체가 무슨 목적으로 생겼으며 어떤 형태로 발전되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더 나아가 신유박해(1801년) 전후에 있어서 이 특별한 동정녀들의 공동체를 형성했던 구성인원을 [사학징의]등의 사료에서 그 명단이 확실하게 나타나는 대로 뽑아 정리해 보면서 그 여인들의 모임의 성격이 어떠했는가를 구체적으로 하나씩 밝혀 보려 한다.
당시 동정을 지키던 처녀들로서 대표적인 이들은 향반(鄕班)이었던 윤점혜, 양반으로서 황사영과 함께 가장 존경을 받았고 선교에 공이 컸던 정광수의 누이동생 정순매, 중인으로써 교인에게 가장 존경을 받았던 이합규의 누이동생 이득임, 열심한 과부였던 이을인애기의 딸 김경애, 양반으로서 독실한 신자였던 조섭의 딸 조도애와 박성염 등이었다.
이들은 거의 다 집안이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동정을 지키는데 가정으로부터는 별로 큰 반대를 받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그들의 동정생활이 비난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윤점혜, 정순매, 김경애는 허가(許歌, 虛氏(없다는 뜻)를 의미)의 아내라 하였고, 조도에는 오가('0'이라는 뜻)의 아내라 하였으며, 박성염은 스스로 과부라고 하는 등 모두 그들의 신분을 숨겼다.
또한 유교적인 사상이 가장 뿌리깊다고 할 수 있는 궁의 나인 가운데서도 동정녀들이 존재하였다.
신궁나인이었던 문영인은 중인계급의 양가에서 태어나, 7세라는 어린 나이로 궁녀로 뽑혀 궁중에 들어갔다. 그의 어머니는 열심한 신자였기 때문에 가끔 출궁하는 문영인에게 천주교를 믿을 것을 권하였지만 궁궐의 생활이 신앙의 자유가 없고 때로는 미신 행사에 참석해야 하므로 이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갑자기 궁에서 병이 들어 출궁한 뒤로 어머니의 권유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문영인 외에도 강경복과 서경의도 모두 동정을 지킨 나인이었다.
이처럼 동정을 지킨 여성들은 사회의 각 계급에 골고루 존재하였다. 이 여인들은 자신들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자유롭게 실현하기 위하여 스스로 동정을 택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동정을 지키면서 사는 생활 형태는 유교사회에서 남녀가 반드시 혼인을 해야 한다는 관념과 제도, 사상에 비추어 볼 때, 부녀자 모두가 맹종해야 하는 갖부장적 가족생활과 후사중시사상을 거부하였다는 결론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결국 그들의 생활을 그 완고한 사회에서 관철시키고 동정을 지키기 위해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으며 동정녀들끼리 공동체를 형성하여 선교활동까지도 조직적으로 수행하였던 것이다.
[사학징의] 등의 사료를 살펴보면 박성염, 이득임 등은 동정을 지키기 위해서 과부로 또는 모씨(某氏)의 아내로 자칭하고 스스로 머리에 쪽을 올렸다고 한다. 즉 이득임, 박성염은 과녀(菓女)로 가칭하였고, 윤점혜, 정순매와 김경애는 허가의 아내로, 조도애는 오가의 아내로 각각 가칭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동정녀들이 즐겨 허가의 아내로 자칭한 것은 완고한 유교중심사회에서 동정을 지키려는 그들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에 의하면 이 허서방이란 특정한 인물이 아닌 허우, 즉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동정녀들이 얼마나 깊이 이러한 생활에 매혹되었는가를 알 수 있으며, 결혼을 거부했던 생활 태도는 당시의 조선시대 유학사회에 대하여 그 사회기층을 동요시킬 수 있었던 여성능력의 확산이라는 영향력을 줄 수 있었던 것이므로 그들 동정녀들의 생활에서 생겨난 사회적 파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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