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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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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종교(1753~1801 프란치스꼬) 날짜 2005.09.30 10:56
글쓴이 관리자 조회 386
일명 '치회'라고도 불리었던 김종교 프란치스꼬는 중인인 의원(醫院)가정에서 태어나 조선에 천주교가 들어오자마자 이를 접한 사람이었다. 그는 1784년(정조 8년)에 조선 천주교의 순교자인 김범우(토마스)로부터 천주교의 교리를 배워서 이릉 받아들이고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어떤 기록에서는 이벽(요한)이 그를 택하여 첨으로 교리를 가르쳤다고도 한다.
프란치스꼬는 쌀쌀하고 호감이 가지 않는 얼굴에 숫기도 없었고 집도 몹시 가난하였으므로 큰 인물들과 별로 접촉을 갖지 못하여 벼슬을 얻지 못하였다. 반면에 그는 글공부에 취미가 있어 이벽은 그를 매우 존중하고 사랑하며 놀라운 사람이라고 자주 칭찬하였다 한다.
입교한 후 그는 최창현, 최필공 등의 교우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교회의 일을 돌보았다.
그러던 중 1795년(정조 19년)에 체포되어 포청세어 일시적으로 나약한 마음을 나타내 석방되었으나, 곧 자신의 나약함을 뉘우치고는 더욱 열성적으로 교리의 본분을 지켜나갔다. 이 해에 그는 최인길의 집에서 주문로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았다. 영세를 받은 후 그는 자신의 신심 생활에 더욱 열심을 내었을 뿐만 아니라 외교인들을 입교시키는 데에도 노력하였고, 마음이 약한 사람들을 격려하며 위로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1801년 신유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프란치스꼬는 일시 양천으로 피신하였다가 천주교 신자로 밀고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포청에서는 과거에 한 번 석방되었으면서도 뉘우치지 않고 다시 금령을 어겼다고 하여 더욱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다. 그리고 동료 교우들과 주문모 신부와 내통한 사실을 자세히 아뢰라고 신문하였다. 그는 이러한 신문과 형벌에 잠시 망설였으나 다시 정신을 차리고 신앙심을 굳건히 하였다.
그리하여 형조로 이송된 후에도 한 마디도 나약한 말을 하지 않고, 전혀 겁내는 표정도 짖지 않았다. 그렇게 형조의 옥에 갇혀 있던 주 마침내 프란치스꼬는 사형 선고를 받고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하였으니, 이때가 1801년 10월 4일(음력 8월 27일)로 그의 나이는 4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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