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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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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보현(1768~1801 프란치스꼬)-1 날짜 2005.07.13 10:49
글쓴이 관리자 조회 370
이보현(프란치스꼬)은 1768년(영조 39년)에 내포지방 덕산 고을 황모실(현 충남 당진군 우덕면)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는 꿋꿋하고 고집스러운 성격으로 동무들 가운데서도 눈에 띄는 아이였다. 일찍이 아버지를 잃었으므로 그는 제멋대로 행동하며 모든 욕심을 마음껏 만족시켰으며, 이에 따라 성격도 비뚤어져 아무도 그를 억제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24세에 이르러 황심(토마스)으로부터 천주교를 배워 입교한 후, 오래지 않아 나쁜 버릇을 고치고 본성을 억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변화된 그의 조용하고 단정한 처신은 이제 모든 이를 감화시키기에 이르렀다.
나이가 들어 결혼할 시기가 되었으면서도 프란치스꼬는 그러한 마음을 조금도 갖지 않았다. 그러나 결혼을 권유하는 모친에게 순종하기 위하여 결혼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의 열심은 날로 더하여졌고 보속과 고행에도 열중하였다. 또 그는 얼마 동안 고향을 떠나 산중에 들어가서 나물만 먹고살며, '천주를 섬기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는 금욕을 실천하던가 순교함으로써 목숨을 바치던가 해야 할 것이다. 이것만이 천주의 진정한 자녀가 되는 방법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순교에 대한 열망을 키워나갔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고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프란치스꼬는 그것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자기 가족과 동네 교우들을 격려하기에 열심이었다. 한때는 주문모 신부를 2개월간이나 모시고 박해를 피하기도 하였다. 그는 날마다 친지들에게 예수의 수난 이야기를 하며, 신앙을 고백하고 천국을 얻을 수 있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권면하였다.
신유박해가 시작되고, 자신이 오랫동안 무사하지 못할 것을 미리 안 그는 어느 날 술을 많이 담그라고 이르며, "이것은 마지막 잔치를 차려서 온동네를 대접하려는 것이니 빨리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관연 이틀 후에 포졸들이 나타나 그에게 "네가 천주교인이냐?"고 물었다. 그는 "나는 천주교인일 뿐만 아니라 이틀 전부터 당신들이 잡으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소"하고 대답하였다. 그런 다음 포졸들을 후히 대접하고 나서 체포되었다. 관청으로 압송된 후 관장의 심문과 프란치스꼬의 대답 내용은 다음과 같다.
"네가 천주교인이냐? 그리고 고향이 어디냐?"
"저는 천주교인이며 덕산 사람입니다."
"네 선생은 누구이고 공범자는 누구누구이며 어떤 책을 가지고 있느냐?"
"제 선생과 동교인(同敎人)들은 제 고향에 있습니다. 책으로 말씀드리자면, 몇 권 가지고 있기는 합니다만 모두 중요한 내용을 다른 것이기 때문에 사또께 바칠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기에 그 책을 내게 보일 수 없다는 말이냐?"
"그 책들은 만물의 대군이신 천주님의 말씀을 적은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사또의 손에 맡길 수 없습니다."
관장은 이러한 대답을 듣고는 기분이 상하여 혹독한 매질을 시킨 후, 다시 옥으로 데려가도록 하였다. 그런데 감사는 이 사건에 대한 통지를 받고 프란치스꼬를 가가 태어난 출생지로 넘기라고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해미(海美)로 이송되었는데, 그 당시 해미의 영장은 두 고을을 맡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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