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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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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백가점, 아니 차쿠의 아침(10) 날짜 2016.04.05 18:42
글쓴이 관리자 조회 878

천주강생 1849년 12월 말경

“이런 시기가 끝나면 뭐하고 싶어요?”

어제 밤늦도록 상의하여 만반의 준비를 끝냈고 이제 든든히 속을 채운후 밤 11시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임시로 둘러쳐져 있지만 조선의 국밥까지 파는 천막식당에서 일찍 저녁을 먹어두는 중이다. 천막 안에는 중국말과 조선말이 섞여 경합이라도 벌인 듯 왁자지껄했다. 구석에 자리 잡은 양업은 점점 매의 눈으로 날카로워지는 밀사의 눈을 보며 나지막이 화제를 돌린다. 이런 일을 앞둘수록 간장을 푸는 것이 좋다.

“소박하게 살고 싶습니다. 식구들과 작은 화전이라도 일구며…. 아마 소박한 거 잃어버리면 다 공허할 겁니다.”

“의왼데요, 인야 씨 눈씨가 소박해 보이진 않는데….”

“그렇지요? 맨날 생사를 넘다 보니 이리되었습니다.”

“맞아요, 소박한 마음 간직하는 게 중요하다 봐요. 일상의 이런저런 굴욕들 소박하게 소화해 내고, 세속 판 속에서도 그분이 주신 가치들을 소박하게 견지해 내는 것, 내 세상 아닌 네 세상이라도 소박히 함께해 주는 것, 작지만 다 증거라고 봐요.”

교회용어를 피해 순교란 말도 증거로 바꾸고 신부님도 그냥 님이라 부르기로 햇다.

“전 그리 생각합니다. 님들 혼자 사시는 것도 증거라고. 매일 본성ㅇㄹ 거슬러 사시는 것 아녜요?”

“정결은 습관이 되면 나은데… 날 죽이는 게 문제예요. 아침에는 너의 나로 살겠다 했는데, 저녁에 보면 나의 너로 살라 한 게 많으니….”

“님, 뜬금없지만… 인생이란 게 혹시 관계연습은 아닐까요. 영원히 지속될 관계를 연습하는…. 왜 가만 놔둬도 먼지 같은 게 앉질 않습니까?”

“오우! 인생이 영원까지 가는 너의 나의 연습이라, 인야 씨 전에 철학 같은 거 공부했어요?”

“아뇨, 저야 아무것도 모릅니다.”

“와… 이 국밥, 먹어본 지 십 년이 넘네.”

그의 눈에 다소 여유가 보이자 양업은 다시 국밥에 수저를 넣었다.

“정말… 엉뚱한 얘기라도 한결 낫습니다. 님도 긴장 푸는 데는 여간 고수가 아닌데요?”

“우리가 진짜…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릴 했네요. 어쨌든 인야 씨 그분께 다 맡기고 움직이자구요.”

“11시니까… 시간은 많습니다.”

양업과 이냐시오는 남는 반찬 하나 없이 모조리 먹어두었다. 일이 잘돼도 내일 이맘때야 음식 구경을 할 것이다. 저녁을 마친 시간이라야 5시 안팎일 텐데 진즉 석양을 쫓던 어둠이 성큼 깔리고 있었다.

천막 문을 열고 나왔을 때였다. 웬 노파가 앞을 막아선 것이다. 광주리 안에는 대여섯 살로 뵈는 사내아이였는데 초점 없는 눈이다.

“한 푼 달라는 것이 아니지라!”

“….”

“할미 따라 장에 나온다고 고집 피더니 물 한 모금을 못 넘겨. 이러다간 금방 일 치르게 생길 판여! 이보시게들, 손자 들쳐 업고 침방에 좀 가주시게! 난 몸 하나 추단하기 어려우이.”

“다른 데 부탁하면 안 될까요? 우린 지금… 안 되는데….”

“보소, 다 피해 가잖여, 손자 좀 살려주이소!”

노파는 아예 양업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어딘데요? 얼마쯤 걸리는데요?”

“동홍진에 침방이 하나 있제, 반 시간이면 될 거셔!”

인야 씨, 어때요 괜찮겠어요, 나지막이 묻는다. “예 지금이 5시니까 6시간이나 남았습니다. 구련성까진 천천히도 한 시간이면 뒤집어씁니다. 대신 가는 길이 칠흑같이 어두울 겁니다.” 어두워도 상관은 없잖아요? “그럼은요, 어두울수록 좋습니다.” 속삭이던 양업과 이냐시오가 그 노파를 돌아보았다.

멀찌감치, 길가 솥 걸고 파는 교자 몇 개로 끼를 때우다 양업의 옆 식탁에 앉았던 변발에게 귀를 댔던 사람, 막 자리 털고 일어서는 광주리 할멈에게도 돈을 주며 어떡하든 시간을 끌라던 사람, 종내 그리되어 한 시간이나 지체된 양업 일행이 칠흑 같아진 구련성 강변에 엎드릴 땐 벌써 조선 쪽으로 백여 미터를 나아가 바위섬에 웅크린 사람, 만반의 준비를 끝냈는지 담담히 뒤를 돌아보는 남자, 범 요한이었다.

아무래도 호산은 멀었다. 시야는 넓었지만 돌발 상황에 대처하기엔 너무 아니었다. 양업 일행이 숨어있을 강변에서 돌 하나 던지면 닿을 거리인 노태산도 생각했으나 뒤쪽보단 자기가 전방에 있는 것이 유리했다. 최단거리와 조선 측의 망루 간격을 계산할 때, 그리고 섬들을 이용한 엄폐를 고려할 때 양업의 예상경로란 손바닥을 보듯 훤하다. 그 동선이란 대여섯 개의 섬들인데 말이 섬이지 여염집 마당만 한 사주(沙洲)라 여름엔 같은 습지대로 연결되리라. 길잡이 경력의 확신으로 그중 북쪽의 섬 하나를 택했는데 지금 웅크려 있는 바위섬이다. 여기서 보이는 강은 상류 쪽이 오히려 너른 호수면 같고 하류에서 다시 넓어져 곧장 위화도로 흘러가고 있다.

어제 단동 임시 시장에서 토끼 한 마리를 사서 장째 가져왔다. 그리고 이 망원경, 심양을 지날 때 큰 성내를 종일 돌아다녀 겨우 찾아낸 영국제의 성능은 그만이었다. 소파가자에서 있는 돈 없는 돈 다 긁어모아 출발했는데 이것 하나 구입하니 몇 푼 남지도 않았다. 망원경으로 며칠 전부터 멀리 호산 숲에 묻혀 근방의 모든 섬들을 관찰했었다. 조선 쪽에서 보면 병풍처럼 둘러쳐졌을 이 바위섬을 송아지를 매놔도 들키지 않을 것이다. 양껏 배를 불린 토끼는 아까부터 쥐 죽은 듯하다. 토끼장보다 몇 배나 큰 솜옷 거적으로 덮어주었다. 이 한파에 탈이라도 난다면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 7년 전 소 떼 무리에 끼여 조선에 들어갔다던 대건 신부에 비하면 고작 토끼 한 마리이지만 만일의 경우 선택의 폭이라도 넓혀놔야 한다.

드디어 그 변발이 일러준 11시, 양업 일행이 잠복해 있는 풀숲에 약간의 움직임이 있다. 짙은 어둠으로 잘 보이진 않지만 몇시간째 한 곳만 지켜봤더니 거기 공기의 변화까지 전해져 왔다. 범 요한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다행히 날씨는 여느 밤 보다 바람이 세찰 태세다. 그러면 그럴수록 기찰은 소홀해질 것. ‘그래 됐다…. 이대로만 되어준다면 입국 성공이다.’라고 할 즈음이었다. 남쪽의 조선 망루에서 검은 물체가 나타나 점점 커지고 있었다. 두 개의 물체로 나눠지는가 싶더니 바로 양업 일행이 숨은 쪽으로 가질 않는가. 아뿔싸! 가만 순라군 하나가 가만, 군견을 끌고 나타났다. 만약 바람이 조선 쪽에서 불어올 것을 고려치 않았다면 개의 코가 금시라도 반응할 거리였다. 이런 일은 정말 흔치 않다고 했는데 야간 정찰이라니 그것도 개를 동원한.

그렇더라도 양업 일행은 사태를 전혀 모르고 있을 텐데 군견은 그쪽으로 가고 있었다. 계속 가까워지는 거리, 큰일이다! 더구나 얼핏 보니 중국이 자랑하는 티벳 장오였다. 장정만 한 덩치가 이리 떼와도 대적한다는 사자개. ‘범 요한…잘해야 한다. 이번엔 제대로 해야 한다. 최 신부님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죽어도 김대건 신부님을 어찌 볼 것이낙. 올 때가 왔다. 30여 년 어설피만 살아온 생에 제대로 해낼 기회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교회를 위해서. 하늘을 위해서….’ 범 요한은 천천히 성호를 그은 다음 장안의 토끼부터 꽉 움켜잡았다. 워낙 큰 놈이라 둔할 수밖에 없겠지만 최대한 빨리 내빼도록 엉덩이를 후려갈겼다. 그러고는 정확히 북쪽 방향으로 냅다 집어던졌다.

“끼긱 끼 끼긱.”

세게 얻어맞은 토끼는 소리까지 질러주며 예상대로 북쪽으로 껑충껑충 뛰어간다. 광풍 속에서도 이 색다른 소리는 대번 군견의 귀를 이끌었다. 군사도 흠칫한다. 어쨌든, 저 호수같이 넓은 북쪽 강바닥으로 유인하면 될 일. 개가 뛰기 시작했다,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바닥이 얼음이라 피차간 쉽지는 않겠지만 군사도 따라 뛰었다. 그러나 봉화 올려! 라는 소리는 과연 나지 않는다. 범 요한의 예상이 적중하고 있었다. 만일 한 망루라도 봉화가 오르면 만사 끝장이다. 순식간에 좌우와 후방까지 요란하게 비상이 걸린다. 그렇게 되면 쥐새끼 한 마리 들어갈 틈이 없고 한 번 걸린 것은 며칠이 갈지… 일이 영 틀어져 버린다. 큰 군견이 뛰어도 봉화 올리란 소리는 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었다. 없는 돈에 토끼까지 구입한 이유이다. 일단 가축이다 싶으면 동네방네 요란 떨 것 없이 한둘이 쓱싹 해치우는 식이 수비대의 습성이라고 단동 장꾼들에게 귀동냥을 해왔었다. 토끼는 다행히 당초 잡아준 방향으로 잘도 달아나고 있었다. ‘그래 도망쳐라. 잡히더라도 멀리 가서 잡혀라.’ 사자만 한 군견이 쫓고 순라군도 따라 뛰어 양업이 숨은 섬과는 점점 멀어져 갔다.

“휴, 시껍했네….”

범 요한은 입안 소리로 한시름을 놓았다. ‘저 정도면 충분하다. 아무리 빨리 돌아와도 10분은 걸릴 텐데 일행이 마저 강을 건너 망루까지 통과하는 데는 5분에서 9분이 관건이다. 9분만 더 버티면 된다.’

범 요한이 안도의 숨을 내쉴 바로 그때였다. 두런두런 사람 소리 같은 것이 바람에 섞여 들려왔다. ‘오늘따라 웬 난리들인가. 혹독한 날씨면 으레 잠이나 처잘 근무자가 강바닥까지 내려와 뭐하는 짓들인가.’ 빨간 담뱃불 두 개가 선명하니 하필… 군견이 뛰었던 자리였다. 직 전방이 바로 양업 일행이 엎드린 섬이니 섣불리 도울 수도 없었다. 범 요한이 기다릴 데까지 기다리다 결정적으로 나서자고 할 때였다. 깜빡이는 불 한 개가 성큼 그 섬으로 향하고 있었다. 풀숲이라야 발목에 차는 정도여서 아무리 납작 붙어도 발각되는 건 불을 보듯 하다.

‘아… 점점… 최 신부님… 안 되는데….’

왜 자다 말고 그 섬엘 갈까. 변을 보려면 가까운 섬들도 많았다. ‘양업 신부님은 이걸 보았을라나.’ 십중팔구 그렇지 못할 것이 좀 전부터 눈발까지 날리고 있는 데다 혹 모았다 한들 어설피 움직였다간 돌이킬 수 없는 낭패였다. 일 났다. 자꾸 가까워진다. 일 났어, 범 요한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아이고 어머이…왔시오, 요한이 이제 죽는 기라!”

범 요한은 머리채를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발간 물 범벅에다 숯검정 칠까지 해놓은 얼굴은 순회 광대이거나 영락없이 미친 사람이었다.

“고마, 올 것이 왔심더!”

혼잣말로 작게 소리 낸 것이 아니었다. 토끼장을 덮었던 솜옷은 단순한 거적이 아니라 짚단처럼 똘똘 말아 세 개의 단추를 채우니 사람 크기의 인형이 되었다. 어설펐지만 봉제 인형은 중국 아가씨의 모습까지 하고 있었다.

“아이고, 홍홍 씨. 가지 마이소! 으엉 엉!”

크게 소리를 지르며 군사들 앞으로 직행하기로 했다. ‘이제 난 죽는다. 그래도 제대로 하자.’ 어차피 눈을 떠도 칠흑 같은 어둠, 아예 꽉 감아버리고 곧장 내달아 버렸다.

“홍홍 씨, 죽지 마이소. 홍홍 씨!”

그러자 섬으로 가던 군사가 움찍하며 돌아보았다. 봉화불 올려!하고 소리치려다 한 번 더 보는 듯했다. 유사시 그들은 두명에다 칼도 활도 있었다. 조선 최공의 무예를 자랑하는 국경수비대의 자존심이 있지, 보아하니 미친놈 하나 때문에 의주 전역에 봉화를 올린대서야 후일 창피거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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