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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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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백가점, 아니 차쿠의 아침(11) 날짜 2016.04.05 18:43
글쓴이 관리자 조회 1614

“누군가? 신분을 밝혀라!”

“엉 엉! 홍홍 씨, 혼자 가면 우짜노!”

범 요한은 인형을 안고 아주 강바닥에 뒹굴려다가 아니지, 순간적으로 드는 생각은 더 남쪽이어야 했다. 그래야 양업의 동선과 멀어진다.

“홍홍 씨… 날 버리지 마이소!”

후다닥 일어나 남쪽 위화도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실성한 사람마냥 해야 하지만 잡힐 듯 말 듯한 거리도 유지해야 한다. 느리게 또 빠르게 되풀이하며 한참을 남쪽으로만 뛰었다.

“이놈이 약 올리나, 섰지 못할까?”

군사 하나가 지척인데도 활을 꺼내 들었다. 쌔~액 하는 소리도 없이 묵직하고 예리한 촉은 어둠을 뚫고 솜바지도 뚫고 범 요한의 왼 종아리에 깊이 박혔다. 날카로운 충격에 범 요한은 그대로 고꾸라졌다. 눈물이 돌며 어머이,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와도 ‘범 요한 이번엔 잘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기어서라도 가능한 남쪽이어야 했다.

“이놈, 뭐하는 놈이냐?”

“홍홍 씨 사랑해예, 버리지 마이소!”

콱 감아버린 눈에 진짜 홍홍이 어릿댔던 것이다. 인형을 안고 광대연기로 시작했지만 가짜 같은 울음이야 터지거나 말거나였다.

자 부싯돌, 뒤따라오던 군사가 부싯돌을 탁탁 튀길 때마다 보이는 작자의 면상이란 완전 실성한 거지였다. 덕지덕지한 낯짝은 가관이고 봉두난발해 풀어진 밑으로 상의도 거의 찢겨 있었다.

“아파… 나 아파, 우리 홍홍이도 아프지.”

범 요한은 안간힘으로 통증을 참아내며 눈을 한 움큼 집어 인형의 볼에 백분처럼 발랐다.

“이 미친놈이 정말!”

활을 쏘았던 군사가 칼을 빼어들었다. 번쩍,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도 검광이 오싹해 올 적엔 이제 마지막이구나, 하고 범 요한은 생각했다.

“잠깐! 지난여름 여기서 여자가 죽었다더니, 그 서방놈 아니야?”

“듣긴 했지.”

“칼만 더럽히는 거 아니냐고?”

“그렇다고 돌려보내면, 근방 미친놈은 다 오게?”

“그렇기도 하네.”

“이렇게 하자, 마비 독도 퍼질 테니 다리 하날 자르자고! 죽든 살든 저놈 팔자에 맡기고.”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차가운 물체가 어둠을 갈랐다.

아악 홍홍 씨! 아픔은 한참 후에 왔다, 무자비하게 밀려왔다. 칼날이 얼마나 예리하고 강했으면 정강이부터 종아리까지 이리 되었을까. 기절하지 말아야 한다. 출혈 과다보다도 이 추위에 기절하면 끝이었다. 그 순간 또 한 차례 차디찬 물체가 후끈하게 지나갔다. 심장이 멎는 금속성의 차가움과 극통의 뜨거움 사이에서 훅 시뻘건 피가 솟아 얼굴로 튀었다. 완전 절단인 것 같았다. 너무 아프면 사람이 이대로… 숨이 멎는가 보다.

“끝냈다… 홍홍 씨….”

두 마디였을 것이다. 그런 말을 하면서 뒤통수째 윙윙대며 공중으로 올랐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득한 골짜기, 더 이상 아프지도 않을 심연 속에 틀어박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하는 희미한 무엇마저 아슴푸레해 가는데….

“야 미친놈, 정신 차려!”

머리 위로 한 뭉치의 눈이 작렬했을 때 대건 신부가 웃고 있었다. 그 인상에 저 화사한 웃음이 있었나 싶다가… 퍼억, 또 한 차례의 눈덩이가 퍼부어졌을 적에는 세상으로 나가는 듯했다.

“놈아, 살아가면 전해라. 조선 국경에 얼씬거렸다간 최소한 네놈같이 된다고! 미친놈이니 이정도야!”

부싯돌을 켜던 군사가 어떻게 끈을 만들었는지 범 요한의 무릎끝을 동여매 주고 있었다. 솜씨도 완력도 있어 그런대로 지혈이 되었다.

“자, 가자고! 미친놈 때문에 반 시강이나 까먹었잖아!”

그들은 지체 없이 돌아섰다.

으…으으…반 시간이라고 벌써 반 시간 지났다고? 그러면 되었다. 양업 신부님 건너고도 남았겠네, 범 요한은 성한 손으로 목 아래 쪽 옷섶을 헤쳤다. 홍홍이 걸어준 십자고상 목걸이가 아직 따뜻하다.

“홍홍 씨, 내가… 내가 말임더, 이번엔 제대로 해냈심더!”

십자고상을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홍홍 씨, 사랑함니더. 그러나… 지는 외다리… 평생 짐이 될 순 없….”

잔뜩 핏대 오른 눈에도 물기란 게 남아있나 보았다.

“부디 행복하이소, 안정된 사람 만나서….”

점점 얼어붙는 허벅지는 무감각해져 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살아야 할 이유는 홍홍 때문이 아니다. 아침까진 살아있어야 양업 신부의 입국 여부를 확인할 수 있을 터 ‘그전엔 죽을 수도 없는 기라.’ 범 요한이 단추를 모두 풀자 봉제인형은 예전처럼 토끼장을 덮고도 남을 담요로 둔갑했다. 범 요한은 그것을 덮어쓰고 아직도 멀쩡한 두 손과 오른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설령 중국 쪽에 다 못 가더라도 강 얼음보다는 군데군데 있는 마른풀 위에 눕는 게 나앗다. 이렇게 모로 기어서라도 구련성 강변까지만 가면 아침 행인이라도 만날 수 있다.

범 요한이 이 문디 요한아, 신부는 못 되었어도 신부님 한 명 살려냈네. 내사 다리 이래 가이고… 평생을 이래 삐도… 괘안타 괘안타 마! 양업 신부님 최 신부님… 안녕히 가시이소. 우리 신부님!

“자… 잠깐만요, 이냐시오 씨.”

양업은 속삭여 말했다.

“이젠 안전권입니다. 말씀하셔도 됩니다.”

“방금 전에 누가 나를 부른 것 같은데….”

“이 광풍 속에 누가 부른다고 그럽니까?”

“아니에요, 아무래도… 저 소팔가자 범 요한 씨 같은데… 엉뚱하면서도 순박한 그 목소리….”

“소팔가자에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게요. 헌데 모처럼 함께 걷는 느낌입니다. 그가 지금 길잡일 해주는 것 같아요!”

“아무튼 축하드립니다. 조선교회가 두 번째 방인사제를 뵙습니다.”

양업 일행은 압록강 경계선을 완전히 빠져나오고 있었다. 이상했다. 이상하게 오늘 밤은 순라군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한 사람도 없었다. 워낙 날이 춥고 바람이 세차 망루 안에 잠이나 자는 모양이었다. 이제부터 조선인에게는 문제가 없고 한 시간 더 가면 굴속에 식수까지 준비했다는 다른 밀사가 기다린다고 했다. 조심성 많은 이냐시오까지 입국을 축하한 것이다. “”신부님 열여섯 살 때 유학길에 오르셨지요.“ 13년 만의 귀국을 환영한다고 한다.

“아니요. 이냐시오 씨 잠깐, 지금은 중국 쪽에 합시다. 저 중국교회 쪽에 인사해요.”

제가 많은 신세를 졌거든요. 신부로 만들어 주고 저를 그냥 나가 아니라 너의 나로 만들어 주었거든요. 그분들이 없었으면 저는 없었을 거예요. 양업은 압록강 쪽으로 허리를 굽혀 깊은 인사를 드렸다.

“고마워요. 범 요한 씨. 까닭은 모르겠지만 이렇듯 바닥 모를 고마움이 솟으니…. 헛되이 하지 않겠어요. 감사합니다, 중국이여 빚을 지고 갑니다. 언젠가는 갚을 날이 오겠지요. 제가 못하면 제 후배들이라도…. 차쿠의 아침 계획은 성공입니다. 절 신부로 만들어 조선에 돌려보내시는 뜻, 꼭 이루어 낼게요. 지켜들 보십시오.”

양업은 다시 한 번 정중한 인사를 올렸다. 북쪽 소팔가자부터 시작해서 마가자, 대건과 함께 감사드리고픈 백가점 아니 지금은 차쿠 본당, 그리고 상해의 성당과 기숙사 저 아래의 홍콩과 마카오까지…. 13년이 되도록 부모형제요 고향이요 모교였던 중국 교회에 이렇게라도 인사를 해야 발길이 떨어질 것 같았다.

“신부님… 그럼 이제 가십시다.”

하는 소리가 들려서

“네….”

하고 조선쪽으로 돌아섰다. 헛, 당연히 밀사 이냐시오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냐시오는 여태 손을 모으고 서서 신부님 중국쪽에 충분히 인사드리란 뜻으로 땅 아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누구란 말인가. ‘오늘따라 귀가 왜 이러지.’ 이명도 아닌데 뭐에 홀린 것만 같다. 검지 끝을 오른쪽 귓구멍에 대어본다. 반쯤 감기던 눈이 코끝과 이마 사이를 향해 있는데 눈두덩 속으로 뭐가 대낮처럼 환해지고 있었다. 그러더니 후끈, 눈꺼풀 전체가 달아오른다.

“어여 와! 업아!”

그다.

“어여 와! 업아!”

대건이었다.

“어여 와! 업아!”

나의 너였다. 그가 조선 쪽에서 두 팔을 벌리고 백가점에서 헤어질 때의 그 동트는 태양을 배경으로 빛으로 웃고 있다.

‘… 건이?’

‘너….’

‘같이 가 건아!’

너의 나는 여전히 그렇게 말했다. 같이… 너의 겨레 내 동포가 있는 곳으로… 영원토록 우리가 있을 곳으로 같이 가….

“자아 이냐시오 씨, 이제 가자구요!”

양업은 대건이 사라진 조선의 하늘을 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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