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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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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에필로그 날짜 2016.04.05 18:45
글쓴이 관리자 조회 735

에필로그

어제 2013년 부활미사를 마치자마자 나는 장하(庄河)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일출 전에 ‘용화산의 아침’을 먹으려는 낭만인지 청승인지를 떨고 싶었던 것은 ‘와서 조반을 들어라.’하셨던 사화때문보다는 겨우내 오고 싶었던 회포를 이렇게나마 풀고 싶었다.

“5시 40분까지 용화산에 도착할 수 있겠소?”

“문제없어요.”

아침식사는요? 했던 물음엔 대답도 않던 택시기사가 되레 내손에 들린 빵과 우유를 보면서는 한마디 한다.

“거, 돈 있어 뵈는 사람이 지독하네요?”

“허, 내가 돈 있어 보인다구…. 그래, 택시론 달에 얼마를 버오?”

“입에 풀칠할 정도.”

“부인도 일하고?”

“점심때 이 차로 교대입니다.”

“애한테 돈 많이 들어가지요?”

아요 말도 말아요! 하며 그가 한참을 토해냈을 때 나는 ‘찌아요’하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속 이야기까지 후련히 쏟아내는 걸 보니 내 진심이 느껴졌나 보았다.

근래 중국인을 대하는 태도가 부쩍 변해가는 나를 보곤 한다. 무조건 좋은 인상이나 하며 최 신부님 흉내를 내보자고 했다. 교구가 부르면 보따릴 싸야 하지만 당장 뜨더라도 원 없이, 미구에 뵐 최신부님 앞에서도 ‘당신의 중국에서 원 없이 닮다 왔습니다.’란 보고만 드릴 수 있으면, 어떤 대단한 일을 하는 것보다 이점을 더 쳐주실 것이다. 조금 전 여관에서의 새벽미사 때도 ‘이제부터 조선만의 사제가 아니라 온 교회의 사제로 살겠습니다. 만인의 사제로 살겠습니다. 만물의 사제로 살겠습니다. 지나는 새 한 마리, 들의 풀 한 포기 안에서도… 환히 웃으시는 부활하신 분을 발견하는 것…. 만물에 만발해 계신 분을 조각하며 살겠습니다.’란 최 신부님의 말씀을 들은 것 같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일까, 마음속에 최양업 신부님 투의 소리가 자주 들린다.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귀고 싶은 원의가 큰 걸까.

실은 내 안에 김대건 신부님 같은 열정(격이야 물론 다르겠지만)이 많고 앞으로도 그러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작 김대건 신부님이 나를 붙들어다 놓는 자리는 매번 최양업 신부님 앞이었다. 겸손, 온유 같은 최 신부님의 덕목들이었다. 소설 최양업을 쓰기 시작하면서 부쩍 더 그러신다.

유난히도 추웠던 작년 1월, 소설의 현장 답사차 166년 전 최양업 부제가 김대건 신부의 죽음에 접한 변문에 갔던 일만 해도 내게 있어선 일대 전환점의 시간이었다.

‘덜커덩!’하며 변문다리 위에서 답사 차량의 차문이 떨어져 나갔을 때 나는 더럭, 그동안 나 때문에 떨어져 나갔을 이들부터 떠올려야 했다. 나로 인해 상처받았을 이들(난 인상이 좋지 않은 신부였다) 차 박사 일행이 “에에 미국산 뷰일(Buick) 차도 중국에선 차이나네, 차이 나.” 한마디씩 하며 카메라를 눌러대는 두어 시간, 나는 20년간의 사제 생활을 자아 비판해야 했다.

거룩한 일을 하면서도 눈을 부라리고 성스러운 일을 한다면서 윽박지를 수 있음을 스스로를 통해 명백히 안다. 어떤 이들은 카리스마라고 부추겼지만 천만에, 그것은 유년 시절 새총 나뭇가지를 성이 찰 때까지 다듬다가 아예 못 쓰게 되거나 자칫 베일 수 있음을, ‘완벽할 때까지’라는 것도 인간의 기준임을, ‘결국 율법주의로 고장 난 게 아니었나?’라고 덜커덩, 고장 난 차문 소리가 일깨워 준 것이다.

제 신세 제가 볶아 전쟁만 같았던 일상, 무엇이 그렇게 몰아세웠을까? 그것은 우상이었다. 이 효한 나 자신이 우상이었다. 우상은 제 자신을 섬기는 데 나도 너도 우리까지도 동원하라고 했다. 양업 신부님은 자비라는 하느님 본성에 일체를 맡겨 죽음의 골짜기에서도 순한 낯빛을 잃지 않으셨다는데 그 순간들을 못 맡기고 불순한 낯빛을 했으니…. 나라는 우상을 섬기느라 제일 힘들었을 자신에게도 변문의 오후는 머리를 숙이라고 했다. 대건 신부님은 군교까지 하셨는데 나라는 우상을 아예 변문다리 밑에 십자가로 달고 싶었다. 성호를 그을 때마다 우상의 상하 좌우에 못을 치는 의식으로 칭하고 싶었다. 그래야 고생했을 나, 너, 우리, 무엇보다 예수님께 덜 죄송할 것 같았다.

정말, 택시기사의 말대로 5시 40분 가까이 되자 거뭇하게 용화산 삼거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기사 양반, 저 위쪽까지 갑시다.”

“마을이 아닌데요?”

나는 극구 차쿠 성당 터가 아예 보이지도 않는 산기슭까지 가자고 요구했다. 냇가에 도착하자 빵 봉지를 내려놓고 기념으로 돌멩이 두 개부터 골라 챙긴다. 백가점의 김 신부님과 차쿠의 최 신부님의 돌이다.

갓, 동쪽 하늘이 시뻘겋게 타오르면서 일출이 시작되었다.

‘와서 조반을 들어라, 빵도 있고 물고기도 구웠다.’

라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한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바람이 벌판이나 산 위 같은 데서가 아니라 홀연 인 것 같은 체험이 있다. 영원한 데서 분 것 같아서는 뛸 듯이 설레었다. 방금 전의 바람도 유사한 것이어서 그 덕에 택시 안에서의 생각이 이어졌다. 어디 있느냐가 아니다, 중국에 있든 한국으로 돌아가든. 무엇 하느냐가 아니다, 사적지 개발을 하든 양로원을 하든 아무것도 못하든. 최양업을 닮아보자는 것이 중국에 온 이유요 한국까지 챙겨 갈 성과다. 그래도… 기회가 되어 중국에 은혜 갚는 일을 해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피의 순교든 땀의 순교든 우리의 사명이란 물질세계에서 영적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니, 물질을 버린 만큼 영이 찰 수 있음이니….’ 차쿠의 냇가에 앉기만 하면 내심, 최 신부님 톤의 소리가 들린다.

‘사람, 변하기가 그렇게 쉽냐?’ 막, 같은 마음에서도 딴소리가 지껄이다 사라진다. 세상 일이 뜻대로 되겠느냐는 그것은 흡사 김 신부님과 최 신부님의 우정에 대해 “세상이 그러도록 놔두지 않았을 텐데요.” 하는 말처럼 미꾸라지 꼬리가 휘젓고 지나는 식이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으로 밝히면 된다.’

란 소리가 뒤따랐다. 이는 마치 내가 끝 날까지 너와 함께 있겠다고 그 산에서 하시는 말씀 같았다. 어둠을 몰아내 버린 일출처럼 더 힘찬 말씀이었다.

“난 지금도 사제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밝아오는 차쿠의 아침에 대고 나는 웃으며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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